[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25)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25)
  • 입력 : 2019. 08.15(목) 20:0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강준 작/고재만 그림

10-1. 제주에 부는 갈바람


불법으로 장기체류하는 자가 2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취업하면서 흉기로 식당 여주인을 상해하는 등 제주 사회에 불안의 요인이 되고 있다


'불법체류 중국인, 기도하던 제주 여인 살해'

비행기 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신문을 뒤적이며 제목을 훑는데 큼직한 활자가 눈에 들어왔다. 용찬은 신문을 반으로 접고 그 기사를 자세히 읽었다.



'제주ㅇㅇ경찰서는 어제 새벽 제주의 한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던 60대 여성 이 모 씨를 흉기로 무참히 살해한 중국인 진 모 씨를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피해자 이 모 씨는 고3 수험생의 엄마인데 자식을 위해 새벽 기도 갔다가 봉변을 당했다. 피해자는 신체 여러 군데 무자비한 자상으로 인해 현장에서 즉사했다. 한편 가해자 진 씨는 범행동기에 대해서 횡설수설하고 있으나 주변인의 말을 종합해보면 평소 자신을 배신한 전처에 대해 증오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여성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이 묻지 마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삽화=고재만 화백.



한편, 무비자 입국이 허용된 이후 한해 60만 명이 넘는 중국인이 제주를 다녀가는데, 이중 체류 기간 30일을 넘기고 불법으로 장기체류 하는 자가 2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취업하면서 집단 패싸움을 벌이거나 취업 브로커 간 수수료 분쟁으로 칼부림도 서슴지 않고 있으며, 흉기로 식당 여주인을 상해하는 등 제주 사회에 불안의 요인이 되고 있다. 경찰은 이들 중 상당수는 중개인들의 도움으로 서울 등 육지부로 건너가 취업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용찬은 '이런 ㅤㅉㅡㅈㅤㅉㅡㅈ'하며 혀를 차다 목이 막혔다. '칵'하고 마른기침을 내뱉는데 옆자리 여학생이 화들짝 몸을 일으키며 쳐다봤다. 용찬은 잠을 깨운 게 미안해서 눈웃음을 보냈더니 여학생은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신문을 접어 홍보물 백에 구겨 넣고 좌석을 뒤로 젖혀 몸을 깊숙이 기댔다. 팔짱을 끼고 눈을 감으니 귀향하는 감회가 새롭게 밀려왔다.

'내 주사가 문제인가 나를 취하게 하는 이 사회가 문제인가?' 용찬은 술을 마실 때마다, 혹은 술을 마시기 위한 변명으로 이 화두를 뇌까렸었다.

기자 생활 10년인데 변변한 출입처 한 번 다녀보지 못하고 지방부, 문화부, 월간부, 사내 근무 편집 일만 담당한 것도 다 술이 원인이었다. 동기들은 승진하여 차장급들이었지만 용찬은 그냥 중견 기자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 이유가 술만 마시면 자신도 모르게 행하게 되는 주사 때문이었다. 그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난 연말의 회식 자리에서 말다툼 끝에 상무에게 술잔을 날린 것은 결정적인 실수였다. 상무가 당장 사표 받으라고 명령했지만, 국장은 차마 용찬에게 그 말은 못 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과하라고만 했다.

용찬은 퇴사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거취에 대해 여러 방도를 생각했다. 젊은 나이에 굶어 죽기야 하랴? 퇴직금 받아서 출판사를 내면 그간 알고 지내던 작가, 교수들이 도와주겠지? 그도 안 되면 치킨집이라도 내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출근하자마자 사표를 썼다.

면담을 신청했는데 국장실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황야의 전쟁터로 나서는 결연한 마음으로 헛기침을 내뱉고 편집국장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국장은 뜬금없이 생글거리는 얼굴로 용찬을 맞이했다.

"잘 왔어. 그리 앉아. 권 팀장 고향이 제주도지?"

"예. 그렇습니다만?"

"자네 제주도에 가서 근무해 보지 않을 텐가? 마침 주재하던 서 부장이 미국으로 이민 가게 돼서 사표를 냈네."

용찬은 문책성 인사가 아니라 심신을 휴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병원에서는 알콜성 지방간이니 술을 끊으라고 하는데 기자라는 게 취재원과 친분을 유지하며 정보를 얻는 일이 기본이라 술자리를 피하기 어려웠다. 정신적으로 피로가 누적돼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주사를 부리게 되는 것이니 장기간의 휴식과 요양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고향에서의 근무라니 전화위복 아닌가?

고맙다고 인사하며 돌아설 때 어깨를 두드리며 국장이 한 말이 떠올랐다.

"요즘, 외국인부동산투자이민제도가 발표되고 무비자 입국이 허용되면서 중국인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는데 가거든 기획취재로 특종 내봐. 점수 좀 따서 만회해야지."

늘 사람 만나고 마감시간을 지켜 기사를 써야하는 바쁜 신문 쟁이어서 명절과 부친 기일에나 짬 내어 다녀오곤 했던 고향이었다.

정겨운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간 바빠서 연락도 못 하고 지냈는데 종필은 제주에 살고 있을까? 오래전 금산과 중국에 가서 종필을 만나던 장면이 떠오르자 아련한 향수에 젖었다. 금산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쓰라린 해연은...

설핏 잠이 들었는데 비행기가 곧 제주에 착륙한다는 안내 방송에 눈을 떴다.



여러분과 함께 아름답고 쾌적한 외국에서 여유로운 삶을 위한 것이니 많은 관심 바랍니다. 한국의 아름다운 섬 제주에서 온 홍보대사를 소개합니다. 왕금산 씨 앞으로 나오세요.




북경의 하늘은 한낮인데도 우중충하게 어두웠다. 사람들은 황사와 미세먼지 때문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사람들로 붐비는 북경 장안가의 베이징 호텔 현관 앞에 고급 외제차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베이징 호텔은 동서양의 문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호텔로 북경을 방문하는 세계 정상들이 숙소로 이용되는 5성급 특급호텔이다. 별난 유니폼을 입은 벨 보이들이 서류 판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들어오는 승용차 번호를 확인하고 차에서 내리는 손님들을 안내했다. 손님들은 나이 든 사람에서부터 젊은 남녀들까지 다양했다. 럭셔리한 장신구로 치장한 지체 높은 당 간부와 부유층 가족들이 대부분이다.

로비에는 '랴오닝 그룹 리쩌라이(李擇來) 회장 축수연'을 알리는 팻말이 놓여 있다.

연회장 입구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공산당 서기, 북경시 당 주석 등 고위 관료들이 보낸 축하 화환들이 즐비하게 서서 위세를 부리고 있고, '축의금 사절'이란 팻말이 놓인 테이블 앞에는 방명록에 이름을 적는 하객들이 길게 줄을 늘어섰다.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는 가족 옆에서 회사 유니폼을 입은 여러 명의 여직원이 입장하는 하객들에게 친절한 웃음으로 기념품이 담긴 쇼핑백을 나눠주고 있다.

붉은 색 융단이 깔린 화려한 연회장 정면에는 '리쩌라이 회장님 만수무강 기원'이라는 황금색 글씨가 새겨진 붉은 현수막이 걸려 있다. 가운데 테이블에는 왕치영 고문과 리 회장 가족들이 자리하고 있고. 수십 개의 둥그런 탁자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앉아 서로 인사를 나누며 떠드는 소리로 장내가 소란스러웠다.

이윽고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고 멘트를 하자 웅성거림이 싹 사라졌다.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리쩌라이 회장님의 팔순 잔치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의 주인공 리쩌라이 회장님을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웅장한 음향과 함께 앞쪽 커튼이 열리며 리 회장이 아들 내외가 미는 휠체어에 앉아 등장했다.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이 일어나 박수로 환영했다.

사회자가 참석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몇 사람의 축사가 지루하게 이어졌다.



"다음은 오늘의 주인공 리쪄라이 회장님의 답사가 있겠습니다."

박수와 함께 환호가 이어지면서 리쩌라이 회장이 자리에 앉은 채로 답사를 했다. 비서가 준비한 원고 파일을 가져와 탁자 위에 펼치고 안경을 내밀었다. 리쩌라이는 그것들을 한쪽에 밀어내며 마이크를 잡았다.

"아직은 원고를 보지 않고 내 정신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장내에 박수가 쏟아졌다.

"감사합니다. 오늘 여러분을 이렇게 오십사 한 것은 앞으로 여러분을 뵙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은혜를 입어 팔십까지 살면서도 한 시도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건강을 허락해 줘서 이렇게 총명을 가지고 여러분을 만나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제 임무는 오늘 여기까지입니다. 저는 너무 오랜 세월을 랴오닝 그룹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동안 도움을 주신 매제 왕치영 고문과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변하는 시간에 대처하지 못하면 내일 당장 문을 닫아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새로운 패러다임과 인재가 필요합니다. 이 시간 이후 랴오닝 그룹에 관한 모든 일은 아들 밍타오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고향으로 돌아가 편안한 여생을 보내겠습니다. 밍타오는 말단에서부터 시작하여 충실히 후계자 과정을 거쳤습니다. 앞으로 리밍타오 회장에게도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부디 행복하십시오."

리쩌라이 회장이 말을 마치자 일동이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누군가의 선창에 따라 '밍타오'를 연호했다. 랴오닝 그룹의 새로운 회장 리밍타오가 마이크를 잡았다.

"아직도 총기가 대단하신데 평생을 일구어 오신 그룹을 저한테 맡겨주심에 책임이 막중함을 느낍니다. 아버지 무거운 짐 내려놓으셨으니 부디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십시오."

말을 마치고 리밍타오는 그 자리에 엎드려 절을 했다. 다시 박수가 쏟아졌다.

"제 그룹 운영방침과 사업계획은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설명드리겠습니다. 다만 이 자리에서 새로운 사업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아름답고 쾌적한 외국에서의 여유로운 삶을 위한 것이니 많은 관심 바랍니다. 먼저 현지에서 사업을 담당하는 분을 소개하고 직접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의 아름다운 섬에서 온 제주홍보대사를 소개합니다. 왕금산 씨 앞으로 나오세요."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5486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