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정묵의 하루를 시작하며] 괴리(乖離)에 대한 괘씸함과 괴심(愧心)

[좌정묵의 하루를 시작하며] 괴리(乖離)에 대한 괘씸함과 괴심(愧心)
  • 입력 : 2019. 05.29(수) 00:00
  • 김경섭 기자 kks@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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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어르신께서 돌아가셔서 문상으로 오랜만에 시골을 찾아갔었다. 고향집은 방치된 지가 몇 십 년이나 돼서 밤이면 도깨비들이 머물 것처럼 음산했고 마을의 풍경은 변해서 어린 시절 놀이터가 되었던 공터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마을 이장인 고향 선배께서 폐가인 고향집에 대해 하소연을 했지만 다 넘겨버린 상황이라서 뭐라고 대답을 해드리지 못했다.

지금은 시골에서 경조사를 치르는 경우가 극히 드문데 내 고향에서는 경조사의 일들을 마을회관에서 자주 치르곤 한다. 아직도 마을의 정서가 남아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이런 날이면 마을회관 한 구석에서 윷판이 벌어지곤 한다. 특히 장례를 치르는 경우 밤을 밝히며 상을 지켜야 해서 밤새도록 윷판이 벌어지고 만 원 정도 시작하던 윷판이 오만, 십만을 넘어가게 된다.

으레 윷판이 벌어지면 큰소리가 오가고 작은 다툼이 일어나곤 한다. 그런데 나보다 예닐곱은 어린 후배가 나보다 다섯 살이나 위인 선배에게 심한 말까지 하며 다툼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참으로 괘씸하다는 생각을 하던 터였다. 그런데 이름도 기억에 없고 얼굴도 가물가물한데 그 후배가 내게 인사를 건네 왔다.

당송 8대가인 한유(韓愈)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 맹간(孟簡)에게 심중을 하소연하며 보낸 편지에 "仰不愧天 俯不愧人 內不愧心(앙불괴천 부불괴인 내불괴심)"이라는 말이 있다.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워할 일이 없고, 아래로 보아서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워할 일이 없으며, 안으로는 마음에 부끄러워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성인이 아니고는 세상에 이런 사람은 없다. 다만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을 뿐이다. 인사를 건네 온 후배가 내게 하소연을 늘어놓았는데 얼굴이 빨개지고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괘씸함이 아니라 괴심(愧心)이 일었다. 선배라는 이유로 억지하고 판을 좌우했다는 말을 듣고는, 문득 어린 학생들의 순수한 생각을 괘씸하다며 무시했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을까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괘씸함이 아니라 괴심(愧心)이어야만 했었다. 오월, 스승의 날을 보내면서 오래전에도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더욱 부끄럽다. 며칠 전 제주도의회 '고교 모의의회 경연대회' 영상을 검토한 적이 있다. 최근 3년 동안 시행되었던 자료인데 안건과 의제만도 60여 개가 넘는 자료이고 찬반의 의사 진행 내용까지 기록으로 옮겼다면 '제주도 현안 문제 백서'라고 해도 나무랄 곳이 없었다.

청소년들답게 순수한 주장들이 전개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내용들은 도의원들이 발의한 조례의 성격이나, 도정을 향한 문제 제기의 질문들보다 제주도의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 깊이 있고 분석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검토해가며 참으로 부끄러웠다. 학교 현장인 교단에 10여 년 섰었고 대학 강단에서도 잠시 흔들거려 보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으로는 몹시도 혼란스럽다. 진정 아이들을 가르칠 수는 있는 것일까. 내가 거품을 물며 역설(力說)한 것들이 지혜는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소한 지식은 되었던 것일까. 아이들 스스로 찾아내고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을 허무적 권위로 흐리게 하거나, 왜곡된 것을 강제했던 것은 아닐까.

<좌정묵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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