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철의 목요담론] 새 것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다

[양상철의 목요담론] 새 것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다
  • 입력 : 2019. 05.09(목) 00:00
  • 김경섭 기자 kks@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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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변에서 국공립기관 및 각급학교, 체육관, 운동장, 공원 등에 시설의 이름을 적은 간판을 쉽게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이러한 간판이 붓으로 쓰거나 칼로 새긴 편액(扁額, 통칭 현판)으로 만들어져 정문, 처마 밑에 걸렸었다. 현판은 예부터 전통적으로 건물의 권위나 위상을 포함하는 상징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건물을 지은 후 거기에 상응하는 최고의 글씨로 장엄케 하고자 했음이 자명하다. 현판은 누가 썼고 얼마만큼 잘 쓴 글씨냐에 따라 가치가 평가된다. 명필이 쓴 현판은 서예사적 가치를 지니고, 특히 임금이 내린 현판은 어필현판이라고 하여 보물 같이 여겨졌던 것이다.

유물은 전쟁이나 화재 등 각종 재해를 당해 손상되거나 멸실되었을 때, 역사적 사실을 입증할 자료를 찾아 복원의 과정을 거친다. 현판의 복원에 대해서는 근자에 논란을 일으킨 현충사, 경복궁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교훈을 얻는다. 현충사 현판은 교체논란이 있었으나 그대로 보존한다는 결정이 났다. 또 경복궁 광화문 현판은 불충분한 사료조사로 그릇되게 복원됨에 따라 최근 다시 재조사 후 복원 완료되어 현판식을 기다리는 중이다.

다행스럽게 요즘의 문화 정책은 선진화를 표방하여 각종 문화관련 위원회가 설립되고 각분야의 전문가가 참여되고 있다. 그럼에도 주요시설에 사용되는 글씨체에 대한 도정의 관심이 별무하여 과연 전문성을 갖고 있는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최근 각 분야에서 서체와 관련한 일이 많아지고 있다. 전문 서예가의 참여와 식견을 수렴하는 노력이 필요할 때이다.

현대에 와서는 현판의 형식이 바뀌어, 건물이나 공원 등의 외부시설도 시설명칭을 쓴 독립 구조물로 현판을 대신하고 있다. 한라산은 명실 공히 제주를 대표하는 명산이다. 한라산 탐방로 출입구인 성판악, 영실, 어리목, 돈내코 네 곳에 한라산 등정이 시작됨을 알려주는 '한라산국립공원' 팻말이 있다. 영실과 어리목 출구에는 판석에 세련된 서체가 새겨진 사각 구조물이 반세기 가까운 세월의 흔적과 함께 보존되어, 국립공원 지정 당시의 기품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성판악과 돈내코에는 초창기 팻말이 없고 새로운 팻말로 교체되어 있다.

옛 것이 낡았다면 원형을 유지하고 보수해야 한다. 구조물이 낡았다는 명분으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서체마저 조잡한 유행 글씨체로 바꾸거나, 빙그레체, 야놀자체, 포천막걸리체, 한라산체 등 생명 없는 폰트체로 바꾼다면 전통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작년에 국가도 서예의 가치와 법적 지위를 확보하고자 서예진흥법을 만들었다. 그만큼 우리 문화 안에 서예가 중요하고 진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새 것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다. 플라스틱이 발명되어 혁명적으로 각종 산업재료로 활용되던 때, 놋쇠그릇 마저 플라스틱으로 바꿔 쓰던 적이 있었다. 만약 오래된 역사를 이어오면서 예술로 존재된 현판의 글씨가 정체 불명의 막글씨나 폰트글씨로 바뀐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전통의 보존 문제는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양상철 융합서예술가·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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