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 작가의 시(詩)로 읽는 4·3] (7)반공강연·1 -관덕정에서(김경홍)

[김관후 작가의 시(詩)로 읽는 4·3] (7)반공강연·1 -관덕정에서(김경홍)
  • 입력 : 2019. 05.09(목)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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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보이지 않았다

타향길이거나 아니면

아버지 나를 연명시킨 산길이거나 간에

길이 있다면 형틀을 이어매고도 갈 수가 있는데

하루를 살거나 그만 끝장내거나

길이 있다면

가는 길을 구걸하고도 싶은데

길은 보이지 않았다

방아쇠를 잡아당기는 적개심으로

찾아 헤매인 길

배신을 하거나 내가 당하거나

길이 있다면

가는 길을 강탈하고도 싶은데

길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광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책가방들이

안개무리로 뿌리 채 일어서

보일 듯 말 듯 떠오른 길은

이내 땅속으로 가라앉고

핏대를 세우고 불러도, 나발을 불고 부르짖어도

거짓은 언제나 거짓인 것처럼

써 준 대본을 읽을 때

눈물로 피눈물로 외칠 때도

거짓은 언제나 거짓인 것처럼

가야할 길은 보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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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아버지는 1948년 입산한다. 1950년 어머니가 조부모를 학살한 토벌군인과 개가해 의붓형을 낳고, 1956년 아버지가 8년의 피신 끝에 중문지서에 자수하고 제주, 서귀포, 성산포를 돌며 반공강연을 시작한다. 아버지는 당국이 써 준 대본을 읽을 때도 눈물로 외칠 때도 거짓은 언제나 거짓인 것처럼 가야할 길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재결합하였고, 종종 기관으로 끌려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999년 연작 시집 '인동꽃 반지'를 상재(上梓)한다. 아버지의 반공주의(反共主義, Anti-Communism)는 거짓 반공주의였다. 1901년 신축년농민항쟁 당시 장두 이재수(李在秀)가 효수(梟首)된 광장. 3·1운동 28주기 기념식을 끝내고 수천 명이 모여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양과자를 먹지 말자'고 외치던 광장. 1949년 6월 무장유격대 사령관 이덕구(李德九)의 시신이 내걸려 있던 광장. 그 광장에서 아버지가 당국이 써 준 대본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 아버지의 피눈물이 거짓이 거짓인 것처럼 시인의 거짓 파괴의 길은 너무 길고 험하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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