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훈의 한라시론] 제주는 '6·18의거'를 기억하라!

[김양훈의 한라시론] 제주는 '6·18의거'를 기억하라!
  • 입력 : 2019. 05.09(목) 00:00
  • 김경섭 기자 kks@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제주4·3이 발발하고 두 달 반이 지난 1948년 6월 18일 새벽, 문상길 중위와 그를 따르는 부하들이 하극상을 일으켜 제9연대장 박진경을 사살하였다. 목숨을 건 거사의 목적은 동족인 제주도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민족반역자의 처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허수아비 하나를 쓰러뜨렸을 뿐 불의한 세상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들은 대한민국이 집행한 제1호 사형수로 총살되었다.

1948년 5월 5일 제주시 미군정청 회의실에서 열린 극비 최고수뇌회의 중, 선무공작을 벌이며 무장대사령관 김달삼과 '4·28 평화협상'을 성사시킨 김익렬 제9연대장은 강경진압을 주장하는 조병옥 경무부장과 육탄전을 벌였다. 김익렬 연대장은 곧바로 해임을 당하고 후임으로 박진경 대령이 부임하였다. 박진경 대령은 연대장 취임사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천명하였다.

1948년 6월 17일, 무자비한 진압 공적으로 대령으로 진급한 박진경 연대장을 축하해주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미군정장관 딘 장군은 삼성혈 인근의 요정 옥성정(玉成亭)에서 축하연을 열었다. 축하연에서 만취한 박진경은 밤늦게 연대본부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새벽 3시경, 그의 숙소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박상길 중위로부터 명령을 받은 손선호 하사는 카빈 소총으로 박진경 대령의 머리와 심장을 향해 두 발의 총격을 가했다.

1948년 8월 12일, 재판과정 내내 박진경을 '민족반역자'로 부르던 3중대장 문상길 중위는 이날 최후진술에서 처음으로 연대장님이라는 존칭어를 썼다. 그의 최후진술 일부다.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의 총애를 받은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 안다."

박진경을 직접 사살한 손선호 하사는 박진경 연대장의 무자비한 공격작전과 처참한 목격담을 설명한 뒤 최후진술을 마쳤다. "박대령을 암살하고 도망할 기회도 있었으나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므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 하나의 생명이 30만의 도민을 위한 것이며 3천만 민족을 위한 것인 만큼 달게 처벌을 받겠다."

1948년 8월 14일, 고등군법재판은 문상길 중위, 신상우 1등상사, 손선호 하사, 배경용 하사 4명에 대하여 총살을 언도하였다. 모두 20대 초반의 기독교인이었다. 1948년 9월 23일 수색에서 집행한 총살형에 앞서 문상길 중위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22살 꽃다운 나이에 나 문상길은 저세상으로 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하에 한국민족을 학살하는 한국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제주시 충혼묘지 입구에는 30만 도민과 군경원호회의 이름으로 세운 박진경 대령 추도비가 있다. 비문에 쓰인 글이다. '제주도 공비소탕에 불철주야 수도위민의 충정으로 선두에서 지휘하시다가 불행히도 1948년 6월 18일 장렬하게 산화하시다.' 역사를 왜곡하는 추도비는 철거해야 마땅하다.

<김양훈 프리랜서 작가>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1803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