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건강&생활] 우리가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

[이소영의 건강&생활] 우리가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
  • 입력 : 2019. 05.01(수) 00:00
  • 김경섭 기자 kks@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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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피츠버그의 날씨는 신기하게도 제주도 날씨와 비슷할 때가 많다. 비가 오는 오늘, 제주도에도 고사리 장마라니 더욱 고향 생각이 나는 날이다.

외래 진료실에서 가장 흔히 보는 일들 중 하나는 질문에 환자가 틀린 대답을 하고, 환자의 자녀가 "엄마(혹은 아빠), 그게 아니잖아,"라고 말을 끊으며 답답해 하는 일이다. 의사 입장에서는 인지 기능이 감퇴된 환자가 틀린 대답을 할 것을 감안하고 던지는 질문들이라 답을 끝까지 듣고 싶은 경우가 많아 "쉿! 기다려 보세요."라고 조용히 제지하곤 한다.

인지 기능은 신체의 다른 기능들과 마찬가지로 성장이 마무리 될 즈음 최고점에 도달했다가 서서히 하강 곡선을 그린다. 나이가 들며 한 해가 다르게 감퇴해 가는 기능 중 대표적인 것이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저장하고 활용하는 능력이다. 어린 학생에게 난생 처음 스마트폰을 던져 주면 아마 그 작동법을 파악해 내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그 학생의 부모님 아니면 선생님도 스마트폰 사용법을 익히는 속도에서만큼은 어린 학생을 따라가지 못하는 게 좋은 예다.

치매 증상을 보이는 노인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도 이런 이유일 때가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새로운 집이나 시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기억하는 옛 집을 찾아 나서곤 하는 것이다. 자녀를 배우자로 착각하는 일도 잦은데, 그것은 지금은 나이가 들어 달라진 배우자의 모습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기억하는 배우자의 젊은 시절을 닮은 아들이나 딸을 배우자로 오해해 그럴 때가 많다. 어찌 보면 자녀들이 자꾸만 틀린 대답을 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참지 못하는 것도, 나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던 부모님이 이제는 의사가 하는 쉬운 질문에 틀린 답을 하기도 하는 노인이 되었다는, 슬프지만 새로운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생기는 일이기에, 이쪽도 저쪽도 안타깝게 느껴지곤 한다.

노인의 생활 환경을 계획 할 때는 이런 점을 중요하게 감안해야 한다. 눈을 감고도 골목 어귀를 찾아갈만큼 익숙한 고향 마을에 사시는 부모님이 치매 진단을 받았다고 하자. 갑작스레 도시에 있는 자식들의 집으로 모시거나 시설로 옮겨드리거나 하면, 더 안전한 환경을 제공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잠시 편할 지 몰라도, 어르신 입장에서는 도저히 익힐 수가 없는 새로운 동네의 지리, 새로운 얼굴들에 혼란이 더해지거나 더 심한 기능 감퇴를 겪기도 한다. 그렇기에 본인이 긴 시간 살아온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안전하게 케어하는 일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 언젠가 시설로 모셔야 하는 때가 오더라도 말이다.

더불어, 제주의 신공항 건설과 같은 대규모 개발 계획 소식을 멀리서 듣고 있자니, 거기 살고 계시는 어르신들은 어디로 가시는 걸까, 문득 염려도 된다. 개발이란, 뒤따르는 환경 오염이나 경관 훼손 뿐 아니라, 그 땅에 뿌리내리고 살던 누군가는 떠나야 함을 의미한다. 어디서 누가 찬성을, 반대를 하네, 부동산 가격이 오르네, 하며 아직 젊고 힘 있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투쟁을 하는 동안, 익숙한 돌담길을 떠나야 할 지도 모르는 풀 뿌리, 나무와 새, 그곳에 오랫동안 살던 사람들도 기억되기를 바라 본다.

<이소영 미국 피츠버그대학병원 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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