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신의 하루를 시작하며] 반성문

[강문신의 하루를 시작하며] 반성문
  • 입력 : 2019. 05.01(수) 00:00
  • 김경섭 기자 kks@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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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에 근무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여름, 조합장님이 "강 서기 마씀, 내일 광복절인디, 태극기가 허러수다. 서귀포 강 하나 사옵서" 하시는 것이었다. 버스 타고 서귀포로 갔다. 삼일빌딩 아세아 마크사에서 태극기를 사들고, 서둘러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하사관학교 동기생을 만난 것이다. 하도 반가워 그냥 보내진 못하고, 막걸리 딱 한잔씩만 하기로 하고 식당에 간 것이다. 제대 후, 결혼이며 살아갈 얘기 등을 안주삼아, 한병 두병 세병 네병… 마시게 된 것이다.

"우리말이야, 인간재생창이라는 그 하사관 학교에서 말이야, 거기서 사람 된 거라구. 시베리아 눈보라 속, 얼음장을 깨고 저수지로 뛰어들 땐 말이야, 난 꼭 죽는 줄 알았어, 우리가 말이야, 그렇게 배고파 허덕이면서도 말이야, 깡으로 그 깡다구 하나로 버틴 거란 말이야. X~도, 세상도 말이야, 다 그렇게 살면 될 거 아니냐 그런 말이야" 그 친구의 무용담(?)을 들으면서, 맞장구도 치면서, 아~헥까닥 한 것이니… 2차 3차에 이어 거침없이, 백만불싸롱으로 들어간 것이다. 한참 마시는데,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그 친구와 웨이터가 다투고 있었다. 만류하였으나, 되려 큰소리치며 대드는 것이었으니 "건방진 놈, 내가 누군 줄 아느냐"며 한 주먹하고, 꼬꾸라진 걸 실내장식 분수대에 쳐 박은 것이다. 왱~ 사이렌 소리를 끝으로 필림이 끊긴 것. 이튿 날, 눈을 떠보니 서귀포경찰서 유치장, 형님과 조합장님과 고향선배인 홍명표 당시 제주신문 지국장님이 와 계셨다.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형님이 서둘러 피해자와 합의를 봐서 며칠 만에 풀려났다.

신혼 셋방에 들어와 바로 사표를 아내 편에 부쳤다. 유일한 생계수단이던 직장의 사표를 들고 가는 아내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울고불고했지만, 어찌할 것인가, 그냥 방에 쳐 박혀 잘 밖에.

그러던 며칠 후, 조합장님이 찾아오신 것이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조합장님은 상이군경임) 이 더위에 언덕길을 걸어오신 것이다. "강서기가 그만두는 것은 당연허우다. 허나, 갈 길이 구만리우다. 근무시간에 술 먹언 행패부리단, 잘렸다고 소문나봅서 그건... 안 됩니다. 근무허당 다들 잊을 만 헐 때, 그만두어도 그때, 그만두어야 헙니다. 아무 소리 말앙, 내일부터 출근 헙서." 어쩌랴, 체면불구하고, 근무를 시작한 것이다.

이후 성산포농협에서 신용부장, 신산 분소장을 지내다가, 1979년 1월 1일 그만두었다. 다들 잊어버릴 만 헌 때, 내 인생 최대의 고비를, 조합장님의 깊은 배려로 무사히 살아 넘은 것이다. 말단 직원에게도 늘 경어를 쓰시던, 하효농협 현학상 조합장님… 내가 살면서 뭔가 조금이라도 이룬 게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그분 그 배려 덕이다. 만약 그 고비, 그 사회 첫 관문에서 꺾였다면, 과연 그 젊음 어디로 흘렀을까? 아찔한 것이다. 그런 내가, 그동안 그분을 한번 찾아뵈온 적이 있었는가에 이르러, 가슴이 미어지는 것이다. 참으로 세월에 핑계가 많아, 70이 넘도록 도무자 인간 도리를 못한 것이니, 죄스럽고 죄스러운 것이다. 부디 건강하시고… 조합장님, 조합장님.

<강문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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