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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장편 연재/갈바람 광시곡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9)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입력 : 2019. 04.25. 2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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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작/고재만 그림

4-1. 어쩌다 그런 인연




바람이 부드러워지더니 메마른 들판에 샛노란 유채꽃이 무더기로 피어났다.

2학년이 되자 자율학습 시간이 늘었고 용찬의 마음도 바빠졌다. 금산은 자동차 정비를 배우기 위해 부친과 담판하여 기어코 서울로 갔고, 종필은 졸업 후 부친의 건설회사에서 일했다.

그해 시·도의원을 뽑는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있었다. 지방의 소소한 정책과 예산까지 대통령과 중앙정부가 관장하던 시대에서, 주민들이 직접 뽑은 도백과 의회 의원들이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조례를 만들고 행정을 집행하는 풀뿌리 민주주의가 시작된다 해서 대대적인 홍보와 교육이 펼쳐졌다.



삽화=고재만 화백

종필의 할아버지 장동철 씨가 고향 지역구에 출마했다. 그는 경찰 출신으로 상원읍 읍장을 지낸 지역유지였는데, 여당 후보가 되려고 출사표를 던진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 청년과 경합 중이었다.

그때, 대룡반점은 여당 유력자의 비밀 아지트였다. 그곳 vip 룸에서 공천 작업이 이루어졌다. 정보를 입수한 장동철 씨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왕강룡 씨를 조용히 불러 심부름을 시켰다. 왕 사장은 기회를 엿보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공천심사위원장을 만나 돈 봉투를 건넸다.

"이거 폭탄 아니지?"

"부담 갖지 말고 수고비로 쓰시라고 했어요."

"애는 써 보겠는데, 안 돼도 나중에 다른 소리 말라고 전해. 그리고 자네도 이걸 발설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렇게 전달은 되었지만, 보좌관 출신 젊은 후보가 공천을 받았고 장동철 씨는 무소속으로 나섰다.



축가를 부르며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는데 문이 열리며 손님들이 들어왔다
일행 중에 반짝거리는 얼굴이 있었다. 해연이었다
순간 용찬은 가슴이 철렁하더니 오금이 저렸다




주말에 용찬은 고향 다녀올 준비를 하는데 저녁이나 같이 먹자는 리화 어머니의 기별을 받았다. 부산 중학교에 진학한 리화도 온다니 용찬도 선뜻 응했다. 어떻게 변했을까?

장사 끝나는 늦은 시간에 맞춰 대룡반점 문을 열었더니, 리화가 달려와 용찬의 팔을 낚아챘다. 아이들은 부모 곁을 떠나면 성장이 빠른가 보다. 또래들보다 조숙했던 리화는 키도 커졌고 어른스러워진 모습이었다.

"오빠, 인사해. 내 선생님이야."

코 밑에 검은 털이 보송보송한 학생이 일어서며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왕은산입니다. 리화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 금산이 동생이구나. 반가워."

용찬은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어서 와요. 거기 리화 옆에 앉아요."

리화 어머니가 음식을 들고 오며 용찬을 맞이했다. 둥그런 식탁에는 처음 보는 음식들이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품평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왕 사장이 앞치마를 벗으며 주방에서 나오자 리화가 숨겨놓았던 케이크를 가지고 왔다.

"사실 오늘, 우리 아빠 왕강룡 사장님 마흔다섯 번째 생신이거든. 오빠는 부담 갖지 말고 즐기기만 해."

그러자 리화 어머니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밖에서 소갈비를 먹자고 했는데, 주인공이 부득부득 우기는 바람에... "

"갈비는 무슨? 내 요리가 더 맛있지. 안 그래? 리화야?"

"그럼요. 우리 아빠 요리는 언제 먹어도 맛있어요. 오늘은 고기로 특식까지 만들었네. 우리 아빠 최고!"

신이 난 리화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금산이는 하필 내일 무슨 자격시험 있대나? 대신 선생님을 부른 거야."

리화 어머니는 용찬의 요리 접시에 음식을 떠주며 가족처럼 살갑게 대했다.

리화가 축가를 부르며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는데, 문이 열리며 손님들이 들어왔다.

분위기가 깨지는 것이 아쉬운 듯 은산이 말했다.

"오늘 영업 끝났는데요?"

그런데 일행 중에 반짝거리는 얼굴이 있었다. 해연이었다. 순간 용찬은 가슴이 철렁하더니 오금이 저렸다. 종필네 가족 네 사람이었다. 왕 씨네 가족 사이에 끼어 있는 자신을 오해할까 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가 조금 늦었지? 해연이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말야. 간단하게 요기할 것만 만들어줘."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왕 사장은 집주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요즘 고생 많으시죠? 선거 치르느라 식사도 제때 못하시고. 거기 앉으세요."

"해연이가 탕수육 먹고 싶다 해서. 짜장과 짬뽕 두 개씩 만들어주고, 빼갈 한 독구리 줘."

"예. 금방 만들어 드릴 테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왕 사장은 옆자리 의자에 걸쳐두었던 앞치마를 다시 메고 주방으로 들어갔고, 리화 어머니도 빈 그릇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생일 파티는 그것으로 끝났다. 리화가 자기네 집으로 가서 놀자고 했지만, 용찬은 결코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어쨌든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일념으로 고개 숙이고 현관으로 향하는데 종필이 다가왔다.

"야, 권용찬. 오랜만이네?"

사회 초년생이었지만 넥타이에 양복 차림이 제법 세련돼 보였다.

"아, 형. 신사 다됐네. 멋져요."

용찬은 종필이 내민 손을 잡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망설이는데, 해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세요? 작년 서울에서 뵀죠?"

용찬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 마음속에 뜬 아스라한 별인데 잊을 리 있겠습니까?' 작년 서울 여행 이후, 해연을 향한 마음을 일기로 기록했던 용찬이었다.

"아, 예. 기억나요. 맛있게 먹으세요."

겨우 한마디 하고서, 넙죽 고개를 숙이고는 도망치다시피 밖으로 나왔다.

"에고 멍청이, '맛있게 먹으세요'가 뭐냐?"

용찬은 제 머리를 세게 쥐어박았다.

몰입하고선 표현하지 못한다고 했던가? 용찬은 가슴이 벅차 일기마저 쓰지 못했다. 잠자리에 누었으나 설레는 가슴은 좀처럼 사그라들 줄 몰랐다.



용찬은 지난여름 남대문 시장 갔을 때 해연이 골라준 남방과 청바지를 차려 입었다
#세수를 다시 하고 그렇게 거울과의 면담을 통과하고서 교회로 갔다.




용찬은 해연을 다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이 일요일이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종필네 가족이 교회에 다닌다는 기억을 곱씹었다. 이전 성탄절 날 급우의 성화에 못 이겨 동네 교회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교회 앞에서 종필의 부모가 가슴에 띠를 매고 사람들을 안내하는 것을 보았다. 그렇고 보니 할아버지 때부터 기독교 집안이라는 걸 종필이 말한 것도 생각났다.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잠은 저만치 도망갔다. 두뇌는 빠르게 연상작용을 했다. 서울 여행 때 신세 졌던 보답을 해야겠는데, 무슨 선물이 좋을까? 음악가의 꿈을 키우고 있는 여학생이니 아무래도 시집이 좋겠지? 그런데 서점은 이미 문을 닫았고, 어떻게 하지? 그러다가 궁하면 통한다고 문대호 생각이 났다.

문대호는 중학교 때부터 신문사 3월 학생문예에 당선되는 등 이름을 날린 문학청년으로, 같은 학교에 다니는 고향 후배였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용찬은 대호의 자취방을 찾아갔다. 자고 있는 그를 깨워 책꽂이에 수두룩하게 꽂혀 있는 시집 가운데서 하나를 얻어 집으로 돌아왔다.

'작년 여름의 서울을 기억하며, 해연에게. 용찬 오빠가'라 쓰고, 곱게 포장을 해놓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자는 둥 마는 둥 날이 밝자 고양이 세수를 하고 교회에 열심인 급우를 찾아갔다.

"예배 시간이 몇 시야?"

"너 무슨 일 있냐? 그렇게 가자고 꼬셔도 끔쩍 않던 놈이, 하나님께 회개할 일이라도 생겼어?"

"회개가 아니라 소원을 빌어 볼 일이 생겼다."



용찬은 지난여름 남대문 시장 갔을 때 해연이 골라준 남방과 청바지를 차려입었다. 거울 속에서 눈이 퉁퉁 부은 영화배우가 어색한 윙크를 보냈다. 아무래도 세수를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꺼칠한 수염이 꽤 굵어져 면도기가 징징 울었다. 그렇게 거울과의 면담을 통과하고서 교회로 갔다.

선거철인지라 교회 앞에는 색색의 어깨띠를 맨 운동원들이 교인들에게 명함을 나눠주고 있었다. 장동철 씨와 해연의 부모도 나란히 서서 열심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종철과 해연은 보이지 않았다.

예배 시간 알려준 친구가 오더니 용찬의 팔을 끌고 교회 안으로 인도했다. 예배당 안 사람들 뒷모습을 샅샅이 살폈지만, 거기에도 해연은 없었다. 경건한 찬송가 소리와 함께 예배가 시작됐다. 목사님은 목소리를 깔며 예배를 진행했으나, 용찬의 귀에는 한마디도 들어오지도 않았다. 혹시나 늦게라도 해연이 들어올까 하여 용찬은 고개를 돌려 자꾸 뒤만 바라보았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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