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찬미의 한라칼럼] 평화를 말할 수 있는 자격

[고찬미의 한라칼럼] 평화를 말할 수 있는 자격
  • 입력 : 2019. 04.16(화) 00:00
  • 김경섭 기자 kks@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지난해 전 세계의 이목을 끌며 개최된 북미 정상 싱가포르 회담 뉴스를 함께 보던 초등학생 조카가 난데없이 폭소를 터트렸다. 왜 그런가 했더니 거칠어 보이는 두 남자가 힘 겨루듯 악수하며 평화를 말하는 모습이 마치 코미디처럼 웃긴다는 것이다. 순수한 아이가 보듯 무릇 평화란 선량한 자들의 전유물일 것 같지만, 현실은 씁쓸하게도 힘을 가진 자들에게만 평화를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나보다. 오랜 반목 끝에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평화 협상 테이블로 나올 수 있게 된 배경도 핵개발 카드 때문이 아니겠는가!

자고로 많은 국가들이 그 존립과 국익을 위하여 서로 대립하고 연대하는 역사를 반복해왔는데, 이 살벌한 국제관계 속에서 군사적·외교적인 힘없이 주장하는 평화는 공허한 울림이 되기 십상이다. 이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로 17세기 초 영국의 왕 제임스 1세가 있다. 자칭 평화주의 군주였던 그가 펼친 외교정책 결과는 당시 영국인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그 이전 스페인 무적함대를 꺾으며 위세를 떨친 엘리자베스 시대와 달리, 제임스 1세는 스페인과의 긴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유럽의 그 어떤 분쟁에도 엮이지 않으려 했다. 어찌 보면 전쟁을 피하며 평화를 호소하는 왕이 성군처럼 보이지만, 사실 전쟁을 기피한 진짜 이유는 군사력 약화와 전쟁을 감당하기 힘든 재정상태 때문이었다. 이 취약함을 숨기기 위해 겉으로 평화주의 노선을 취했을 뿐, 실제로는 사치를 즐겨 재정을 고갈시키고 의회마저 강제로 해산시키며 국가를 위기로 몰고 갔다. 스페인 중심의 구 가톨릭 세력에 맞서 유럽의 개신교를 지켜내는 힘이야말로 진정한 평화라 확신했던 영국인들에게, 제임스 1세가 외치는 평화는 그의 실정을 가리기 위한 허울로 드러났으며 그는 결국 비겁하고 무능한 군주로 역사에 남게 된다.

이처럼, 지켜야 할 것을 끝내 지키지 못한 채 부르짖는 평화는 변명이나 구실에 지나지 않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최근 진행되고 있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앞으로 과연 어떻게 쓰여 질 것인가. 누구나 이 한반도에서 전쟁 위협이 사라지고 평화가 안착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국력과 외교력을 토대로 평화를 제대로 준비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평화를 주도하겠다고 큰소리 친 우리들은 정작 관련 논의와 회담을 지켜볼 때 왜 그리 초조하고 아쉬워만 했을까. 주도권은커녕 여유 없이 끌려가기만 하는 중재자의 위치를 확인만 했을 뿐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갈등을 말로만 중재하며 평화를 제안하는 것만으로는 진짜 평화무드를 조성할 수 없다. 우리는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잃으면 얼마나 고되고 비참해질 수 있는지 지난 역사를 통해서도 배웠다.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국방을 든든히 하고 국력을 키우며 치밀한 외교 지략을 펼칠 수 있도록 정부와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능력으로 나가야만 한다. 한반도 평화라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하려면, 무서운 손님들 눈치 보며 달리는 운전기사 역할은 이제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운전대를 잡는 손에 반드시 힘이 실려 있어야만 한다. <고찬미 한국학중앙연구원 전문위원·문학박사>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4693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