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마르지 않는 '4·3의 눈물', 누가 닦아주나

[사설] 마르지 않는 '4·3의 눈물', 누가 닦아주나
  • 입력 : 2019. 04.03(수) 00:0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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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의 상흔은 너무나 컸습니다. 그 아픔은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겁니다. 제주4·3연구소가 진행한 4·3증언본풀이 마당에 쏟아낸 얘기들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엊그제 증언한 올해 일흔아홉의 김낭규 할머니는 70년 전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4·3 때 산으로 도피했다는 이유로 총살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어머니와 할머니·할아버지까지 다 잃었다고 울먹였습니다. 철모른 나이에 4·3을 만난 정순희(84) 할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13살이던 1948년 둘째 오빠가 행방불명 됐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물고문에 전기고문까지 당했다고 털어놨습니다. 어머니는 서북청년단에 의해 공개 총살을 당했는데 그 현장을 직접 봤다는 겁니다. 지금도 고문 후유증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4·3의 광풍으로 수많은 도민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도민이 희생됐으면 사망자의 정확한 통계조차 나오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4·3 당시 희생된 도민의 사망자 수는 제각각 다릅니다. 한국 정부는 2만7719명이고, 미국 공식 자료에는 1만5000~2만명으로 나옵니다. 특히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4·3으로 8만명이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고 했습니다. 1940년대 말 제주 인구가 30만명임을 감안하면 적어도 도민 10명 중 1명이 희생된 셈입니다. 인명피해만이 아닙니다. 4·3으로 제주의 수많은 마을과 학교가 불에 타 사라졌습니다. 당시 중산간 마을의 대부분이 초토화되는 등 막대한 재산피해를 입었습니다. 4·3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했습니다.

다시 어김없이 4·3을 맞았습니다. 떠올리기조차 싫은 고통스런 날이요, 비통한 날입니다. 잘못된 국가공권력에 의해 소중한 우리의 가족들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70년이 지나도록 국가는 책임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정치권이 적극 나서는 것도 아닙니다.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한 4·3특별법 개정안이 여전히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기대를 걸었던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도 소득없이 끝났습니다. 4·3특별법 개정안 처리에 빨간불이 켜진 겁니다. 그래도 최근 여·야 지도부가 4·3특별법 개정안을 챙기겠다고 한만큼 기대를 갖게 합니다. 특히 고령의 생존 희생자와 유족들에게는 더 이상 기다릴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정치권이 4·3특별법을 조속히 처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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