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청년단 제주4·3 당시 금품수수 입증 문서 발굴

서북청년단 제주4·3 당시 금품수수 입증 문서 발굴
본보, 4·3시기 마을회로부터 후원금 명목 1만원 수수 영수증 입수
  • 입력 : 2019. 04.03(수) 00: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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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금품 강요·테러 일상적… 진압과정 부정적 행태 근거 자료

4·3당시 서북청년회(단)는 주민들로부터 일상적으로 금품을 강요하고, 구타와 폭력을 일삼았다. 이는 4·3발발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제주도민을 대상으로 한 서북청년단의 금품 수수 행위를 입증하는 근거 자료가 발굴됐다. 본보는 최근 서북청년회가 마을회로부터 금품을 수수하고 이를 확인차원에서 써준 영수증을 입수했다.

영수증은 서북청년회 안덕분회 위원장 원모씨가 OO리 대표 양모씨로부터 일금 1만원을 받고 써준 것이다. 영수증은 1948년 4월 20일자로 작성됐다. 내용은 한문과 한글을 혼용해 '우 본회 후원금으로 정히 영수함, 1948년 4월 20일 서북청년회 안덕분회 위원장 원OO, OO리 대표 양OO 좌하'로 돼 있다.

영수증을 받은 사람이 마을 대표임을 나타낸 것으로 보아 금품은 개인이 아닌 마을 차원에서 주민들로부터 돈을 거둬 전달하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1만원은 큰 돈 이었다. 한국통계진흥원의 2008년 발간 자료에 따르면 1948년도 1만원의 가치를 2008년도 기준 환산했을 때 1억 원으로 추산했다. 1948년 제주도 전체 조수입은 1억5733만 원 정도로 당시 인구 25만 명을 기준으로 나두면 1인당 연 소득은 630원 정도다. 1만원은 16명의 1년 소득에 해당된다. 실제 체감정도를 비교하면 더하다. 당시 제주성내 양옥집 1채 값은 200원 정도에 거래됐다. 1만원은 주택 50채 값에 해당되는 액수다. 당시는 현금이 어려운 시절이어서 농촌지역서 이만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고통을 겪어야 했을 것으로 보인다.

마을 주민들이 이러한 거금을 선뜻 모아 전달했을리는 만무하다.

서북청년회는 1947년 초부터 제주에 들어와 4·3기간에 걸쳐 주민들을 상대로 돈과 쌀을 강요하고, 강매에 응하지 않을 경우엔 구타와 테러 등을 서슴지 않았다. 때로는 빨갱이로 몰아 고문을 자행하고 이 과정에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들을 구명하기 위해 가족들이 금품을 싸들고 오기 때문에 나중에는 금품을 노리고 억지로 빨갱이로 몰아 잡아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일부는 군경에 투신하고, 군경과 함께 무장대 진압에 나서 무차별 토벌작전으로 피해를 키웠다. 준 군경조직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영수증은 4·3이 일어나고 험악한 분위기속에 서북청년회가 무장대 토벌을 위해 주둔하자 마을 사람들이 화를 피하기 위해 금품을 전달했음을 짐작케 한다. 한 전문가는 "빨갱이 색출을 명분으로 한 진압과정의 부정적인 행태를 보여주는 결정적 근거 문서"라고 말했다.

정부가 확정한 '4·3진상조사보고서'에도 "서청 단원들은 4·3발발 이전에 500~700명이 제주에 들어와 도민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 그들의 과도한 행동이 4·3발발의 한 요인으로 거론되었다. 4·3 발발 직후에는 500명이, 1948년 말에는 1000명 가량이 제주에서 경찰이나 군인 복장을 입고 진압활동을 벌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서청의 갖은 횡포와 탄압이 4·3발발의 한 요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박찬식 박사(제주학연구센터장)는 "당시는 서청이 마을을 다니면서 테러를 일삼고 금품 갈취가 일상화되던 시기로 압력을 넣어 강제 징수한거나 다름없음을 보여준다"며 "이러한 행태들이 4·3발발의 원인이 됐다"고 언급했다. 이어 "개인 또는 마을별 소장문서에 대한 전수조사 등 범도민자료수집 운동을 통해 4·3진상을 규명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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