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문화계 이 사람] (23)김윤수 칠머리당영등굿 보유자

[제주문화계 이 사람] (23)김윤수 칠머리당영등굿 보유자
"찾아주는 이들 맺힌 가슴 풀린다면 바랄 게 없어"
  • 입력 : 2019. 03.26(화)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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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칠머리당영등굿 전수관에서 만난 김윤수 보유자. 굿에 대한 편견은 줄었지만 시대 변화로 단골이 줄어드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진선희기자

예순해 가까이 무업의 길
과거엔 굴 속에서 몰래굿

문화재 지정후 편견 줄어
매해 단골 감소는 아쉬워
젊은 사람 영등제 관람을

지난 20일 제주시 사라봉 자락의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전수관. 음력 2월 14일인 이날 바다에 새로운 씨앗을 뿌려준다는 영등신을 떠나보내는 영등송별대제가 열렸다. 음력 2월 1일 영등환영제에 비해 송별제는 더 풍성하게 치른다. 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 심방들은 차례로 제차에 참여해 저마다 장기를 드러낸다.

김윤수 칠머리당영등굿 예능보유자는 풍어를 가져다주는 영감의 내력을 풀이하고 영감신을 청하는 영감놀이 장면에 등장했다. '큰 심방'인 그는 영감신을 성대히 대접해 돌려보내며 영등굿의 폐막을 알렸다.

나이 일흔이 넘은 김 보유자가 굿판에 발을 디딘 건 열여섯살 때다. 큰 심방이던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몸이 아팠고 주변에선 무업을 이어야 신병을 고칠 수 있다고 했다. "나이도 어렸고 심방을 천하게 보던 시절"이라 도망치듯 서울로 떠났지만 병은 낫지 않았다.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스물 아홉에 처음 자신의 이름을 걸고 굿을 주재했다.

이 무렵 칠머리당영등굿 1대 보유자였던 안사인 심방을 따라 소미(보조 심방)를 하며 굿 공부에 열정을 쏟았다. 굿판의 엄중했던 스승들에 비해 안 심방은 온화했다. 1990년 안 심방 별세 뒤 보유자에 오른 그는 고인이 했던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윤수야, 기왕 심방질을 시작했으니 나랑 손잡고 마음 편히 잘해보자."

칠머리당영등굿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해는 1980년 11월이다. 제주섬 주민들의 해양생활상이 담긴 칠머리당굿의 중요성을 인정한 결과였다. 당초 명칭은 칠머리당굿이었지만 영등신이 기원 대상인 문화재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2006년 칠머리당영등굿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김 보유자는 영등굿이 국가문화재에 이어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굿에 대한 편견이 조금은 걷힌 것 같다고 했다. 사라봉 굴 속에서 몰래 굿을 해야 했고 굿청이 이따금 훼손되는 일을 겪어온 그에겐 그 변화가 남다르다. 하지만 단골(신앙민) 수는 매해 줄고 있다. 김 보유자는 "칠머리당이 있는 건입동 해녀, 선주만이 아니라 제주시 동·서부 지역 해녀들도 송별제에 함께 했으면 한다"며 "젊은 사람, 청소년들도 영등 의미를 나누고 관람 분위기가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 심방들이 대부분 70대라 대잇기 고민도 있다. 저 세상으로 가버린 정공철 심방과의 이른 이별이 아쉬운 건 그 때문이다. 그 역시 예전같지 않지만 몸이 허락하는 한 찾아주는 이의 맺힌 가슴을 풀어내는 심방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4·3문화예술축전, 탐라국입춘굿놀이 등에서 굿을 집전해온 그는 2002년 다랑쉬굴 위령굿을 잊지 못한다. 처참한 죽음의 사연이 떠오른 현장은 눈물바다를 이뤘고 그도 4월의 혼들과 만났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고 같이 울음 우는 곳, 김 보유자가 걸어온 굿판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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