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3)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3)
  • 입력 : 2019. 03.14(목) 20:0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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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작/고재만 그림



1-3. 강하의 새벽안개를 헤치고


사람들이 망망한 바다만 바라보며 망연자실해 있는데 누군가 배가 온다고 소리쳤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까지 갑판으로 올라와 손을 흔들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질렀다.성조기 휘날리며 쏜살같이 미국 군함이 다가왔다. 커다란 대포를 매단 위풍당당한 모습에 갑판 위는 또 한 번 술렁거렸다. 미군 병사들이 해상호로 올라와 사건 경위와 실태를 조사하고서 향방을 물었다.

삽화=고재만 화백

지금 부산은 피난민들로 넘쳐나서 발붙일 곳을 찾기 어렵다고 했다. 항해사가 가까운 곳에 제주도라는 섬이 있다고 했고 경험 많은 선장이 풍광이 수려한 곳이라고 거들었다. 그곳으로 피난민들이 많이 들어갔다고 미군 통역사도 말했다. 양수이핑이 결단을 내렸다. 우여곡절을 겪은 해상호는 미국 군함의 꽁무니에 매달린 끝에 동터오는 새벽이 되어서야 제주 산지항에 도착했다.



커쿠나이라오(克苦耐勞)는 어디에서건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화교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했다





제주의 하늘은 드높고 푸르렀다. 햇살은 부드러웠고 공기는 청량해서 사람들은 저마다 바람을 마시며 즐거워했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어린애를 포함하여 81명이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낯선 땅에 상륙한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진 이국적인 모습에 잠시 긴장했다. 양수이핑은 일행들을 모이도록 했다. 그의 얼굴에는 결연한 의지가 돋보였다.

"이곳은 한국의 제일 남쪽 끝에 있는 제주라는 섬입니다. 여기에는 의지할 수 있는 화교도 없고 우리가 개척하며 살아야할 곳입니다. 배는 고장이 나서 더 이상 운항할 수 없으니 여기에 뼈를 묻을 각오로 일합시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고국은 인민공화국이 들어서서 오고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외국에 이주하여 억척스럽게 발판을 닦아 뿌리내렸어요. 커쿠나이라오(克苦耐勞)는 우리 화교들의 정신입니다. 우리도 개척자의 정신으로 열심히 살아갑시다. 자 따라 하시오. 커쿠나이라오."

사람들은 '커쿠나이라오'를 세 번이나 복창했다.

고통을 이기고 인내하며 일하자는 말은 어디에서건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화교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했다. 일행은 일자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가게를 얻어 중국에서 가져온 비단 등 수입 직물을 팔거나 화장품, 장신구 등 수입 잡화를 팔기도 했고, 남의 집 가정부나 행상도 마다하지 않았다.

호떡을 만들어 팔거나 만두가게를 하는 이들도 있었고 중화요리점을 내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 일자리 얻기 힘든 사람들과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해상호에서 생활을 했다. 먹을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바다와 민물이 만나는 산지천에는 사시사철 솟아오르는 용천수가 있었고 고깃배들이 매일 오고 갔다. 제주 사람들은 돔, 북바리, 고등어, 갈치 같은 고급 어종의 고기들만 먹고 상품 가치가 없는 어종들은 버렸다. 아침이면 선창에 나가 그것들을 주어다 요리해서 먹을 수 있었다.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밭을 세내어 농사를 지었고,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사라봉 기슭 공터에 텃밭을 만들어 각종 채소를 가꾸고 그걸 팔아 밀가루를 샀다.

화교들의 농사는 특이 했다. 당시 제주에 채소라고는 배추, 무, 당근, 감자가 대부분이었지만 화교들은 가지, 파, 양파, 오이, 시금치, 마늘, 고추, 호박, 상추들의 종자를 중국에서 수입해 와 계절별로 윤작했다. 좁은 면적을 넓게 사용했으며 부지런했다. 그들은 해가 뜨면 일어나 밭에 가서 해질녘까지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했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아궁이에서 나온 재를 모으고 관청의 변소에서 인분과 오줌을 싼 값에 구입하여 퇴비를 만들었다. 이렇게 마련된 유기질 비료를 풍부하게 사용하니 작물의 품질도 좋아 제주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경작물을 광주리에 이고 부잣집을 방문하여 판매 하거나 손수레를 이용하여 식당에 배달을 했고, 남은 채소는 거리에 좌판을 놓고 염가로 팔았다.



양수이핑은 한천교 옆 땅을 사서 소학교를 지어 아이들을 교육시키도록 했다. 그는 단결과 염치, 예의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계를 만들어 화교들이 사업을 할 때나 큰돈이 필요할 때는 십시일반으로 서로 돕도록 했다.

링링은 소학교가 완성되자 학교를 맡아 운영했다. 그 사이 강룡의 여동생도 태어났다. 치관은 산지항 부근의 식당 주방에서 일을 했는데 봉급도 신통치 않고 주인이 중국인이라고 얕잡아보고 자주 트집을 잡았기 때문 1년도 못 채우고 그만뒀다. 그래서 가족들과 의논 끝에 장인과 화교들의 협찬을 받아 음식점을 내기로 했다.

시청, 경찰서, 우체국, 은행 등 관공서가 밀집되어 있는 번화가 초입에 건물을 임대하여 중국 식당을 열었다. 가게 이름은 장인이 강룡까지 대대로 번창하라는 뜻에서 대룡반점으로 명명해 주었다. 같은 배를 타고 온 동족들이 식당일을 도왔다. 주방과 허드렛일을 거들고, 화농(華農)들이 경작한 채소를 공급받고, 배달통을 운반했다.

시내 여러 곳에 중국 음식점이 생겼지만 대룡반점의 짜장면은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장사는 잘 되었다. 손님들은 주변의 공무원뿐만 아니라, 피난민들 중 꽤 이름 있는 문학인, 예술인들이 단골이었다.



독재 정권은 외국인을 차별하며 핍박이 아주 심했다
화교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땅 한 평 제대로 가질 수 없었다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군사 정권이 이어지면서 화교들의 삶의 여정은 험난했다.

자유당 정부는 6·25 직전 전국에 창고 봉쇄령을 내렸다. 이에 창고를 사용하는 화교 무역상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어 내려진 외국인에 대한 외화 사용 규제책은 화교의 무역업에 족쇄를 채운 격이었다. 이로 인해 화상(華商)들은 한국 기업과의 경쟁을 감당하지 못하고 점차 문을 닫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타격을 입은 것은 통화개혁이었다. 현금소지를 선호하는 화교들이 가진 화폐는 자유당 정권과 군사 정권에서 시행한 두 번의 통화 개혁을 거치면서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말았다. 양수이핑은 마지막 통화 개혁에 큰 충격을 받아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이승만 정권은 유독 중국음식점에 대하여 불리한 세율을 적용하고 음식 값을 통제하여 많은 어려움을 줬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1961년에는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의 시행에 따라 토지를 소유하려면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훗날 대룡반점을 운영했던 왕강룡 씨는 독재 정권은 외국인을 차별하며 핍박이 아주 심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화교들은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땅 한 평 제대로 가질 수 없었어요. 1970년에야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이 제정되었는데, 그때야 비로소 1가구에 1주택 1점포만 허용되었어요. 하지만 그것도 제한이 있었죠, 주택 면적은 200평 이하로 하고, 점포는 50평 이하만 허락되었어요. 또한 몸이 아파 장사를 할 수 없게 돼도 취득한 토지와 건물은 자신만 사용하고 타인에게 임대할 수도 없었죠.

논밭이나 임야의 취득도 불가능했어요. 채소 경작은 우리 화교들의 주요 생업 중 하나였는데, 밭의 소유가 불가능하게 되니 일부는 편법을 썼죠. 화교 농민들은 더러 그 소유권을 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 아내나 한국인 친구의 명의로 해두고 경작을 계속했어요. 그 과정에 탈도 많이 생겼죠. 한국인 마누라가 이혼을 하거나, 믿었던 친구가 몰래 그 땅을 팔고 도망을 가버리는 경우엔 경작지의 소유권을 잃어버리게 됐으니까요.

그것뿐이겠어요? 외국인 거류 제도에 의해서도 고통을 받았죠. 당시 한국에는 영주권 제도가 없어서 화교들은 「외국인 출입관리법」을 따라야 했어요. 외국인 거주자는 2년에 한번 비자를 갱신 받아야 했는데 그것이 아주 번거로웠어요. 갱신 때가 되면 육지에 나가 있다든지 꼭 일이 생기더라구요. 1997년이 되어서야 갱신 기간이 5년으로 바뀌어 다소 사정이 나아졌어요. 그래도 한국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해서 세 아이들 키우고 공부시켰으니 한국에 감사하죠."



제주에 살던 왕강룡 씨는 대만으로 유학 가서 대학을 다녔다. 대학에서 만난 한족 출신의 여학생과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동생은 화교의 중매가 있어 일찍 부산으로 시집갔는데 그 매제 부친이 무역상을 경영하고 있었다. 강룡 씨는 일을 도와달라는 매제의 권유로 부산에서 직장을 얻었다.

강룡 씨가 아들 둘을 낳고 알콩달콩 재미있게 지내고 있던 어느 날 제주에서 급한 전화를 받았다. 대룡반점에 불이 났다는 소식이었다.

제주에 내려와서야 강룡 씨는 모친이 화재로 숨졌고 부친은 화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초상을 치르고 나서 집 정리를 하는데 이웃 사람들한테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방 안에서 잠자던 부인이 질식해 죽어가고 있는데도 치관 씨는 정신없이 웍과 도마 칼만 부둥켜안고 나왔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날마다 처절하게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환자에게 차마 따질 수도 없었다. 아무리 효도를 다하는 일등 자식이 있어도, 평생을 구박하는 악처라도 남편에겐 부인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룡 씨는 그때 알았다.

대룡반점은 강룡 씨가 앞장서서 새 단정을 하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모친이 죽은 지 삼 년째 되던 해 시름시름 앓던 부친도 돌아갔다. 왕강룡 씨는 제주에 눌러앉아 가업을 이어야 했다. 그 해에 귀염둥이 딸 리화가 태어났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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