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2)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2)
  • 입력 : 2019. 03.07(목) 20:0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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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작/고재만 그림

1-2. 강하의 새벽안개를 헤치고


"형! 가지마."

자세히 보니 동생 치영이었다. 잠도 안자고 부친과 나누는 이야길 엿들은 모양이었다.

치관은 안쓰러운 마음을 숨기기라도 하듯 치영의 손을 덥썩 잡았다.

"치영아, 미안하다. 부모님 잘 부탁한다. 꼭 다시 돌아올 게."

치영은 혼자 떠나는 형을 야속한 눈으로 쳐다보며 대답 대신 눈물 두 줄기를 뚝 흘렸다.

치관은 그 눈물 자국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으며 동생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림=고재만 화백

뱃고동 소리가 걸음을 재촉했다. 커다란 배낭을 둘러맨 치관은 거리의 자욱한 안개를 헤치며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렸다. 부둣가에 다다르니 링링네 커다란 배 세 척이 안개 속에서 사람들을 삼키고 있었다. 링링을 찾아서 이리저리 한참을 부산하게 움직이는데 맨 앞에 세워진 해상호 갑판 위에서 치관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링링이었다.

1949년 9월 무덥던 날, 해상호(海祥號)를 비롯한 세 척의 배는 기다란 뱃고동을 남기고 짙은 안개 속을 헤치며 강하를 떠났다.



배를 돌려 인천으로 가자
거기는 우리 배가 드나들던 곳이고 한족 마을이 있는 곳이다



해상호에는 링링네 가족과 친척 등 30여 명이 타고 있었다. 갑판 위에는 쌀가마니를 비롯한 살림 도구들과 짐들이 쌓여 있었고, 2층에는 주방시설이 있는 식당과 연회장, 고급 손님들을 위한 특실이 있었다. 1층은 대여섯 명이 생활할 수 있는 방이 여러 개 있었다. 배 안의 사람들은 인척간이어서 저들끼리는 화기애애하게 소통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지만 치관을 소 닭 보듯 했다. 치관은 가장이 된다는 기쁨보다도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슴을 짓눌렀다. 장인의 배려로 침대 있는 방을 링링과 함께 쓰면서 식당 취사를 자원했다.

아침과 점심을 각자가 해결하고 저녁이 되어서야 식사가 준비되었다. 사람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여 들었다. 링링의 아버지는 주위를 환기 시키며 치관과 링링을 일으켜 세우고는 타이완에 도착하면 결혼식을 올릴 거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사람들은 그제야 치관을 왕 서방이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했다.

밤이 되면서 바람이 강해졌다. 술잔을 기우리고 춤을 추며 흥에 겹던 분위기가 배가 몹시 흔들리면서 두려움으로 변했다. 사람들이 술에 취하기도 했지만 멀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고 휘청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접시들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에 사람들은 비명까지 질렀다. 곧 선장이 내려오더니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고 선주인 양수이핑에게 보고했다.

"9월에 태풍이라니?"

양수이핑은 너그러운 인품만큼이나 태연했다. 그러면서 좌중들을 진정시킨 후, 가장 가까운 한국의 항구를 물었다.

"금방 지나친 인천이 가장 가깝습니다."

"그래? 그럼 배를 돌려 인천으로 가자. 거기는 우리 배가 드나들던 곳이고, 우리 한족 마을이 있는 곳이다."



인천 항구에 세 척의 배를 정박시키고 양수이핑은 측근들과 잠시 내려 마을을 정찰했다. 한족 마을(차이나타운)에는 중국식 건물도 많았다. 오래 전 터를 잡은 화교들이 지나가는 동족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양수이핑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바지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각자 자리를 잡아 짐을 풀라고 했다. 그제야 신양호에는 링링의 외가 쪽 사람들, 대양호에는 국민당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아이들을 포함해서 족히 백이삼십 명은 되어 보였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세내어 집을 얻었고 집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선상 생활을 했다.

인천에 있는 화교들은 옷감, 피혁 제품, 수입품 잡화 등을 본토에서 구입해 와서 판매하고 있었다. 조선 토산품을 중국에 수출하거나, 정기 여객선을 이용해 행상을 하기도 하고, 음식점을 하거나 농사를 짓는 등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었다.

배를 타고 온 일행 중에 운 좋은 사람들은 화교가 운영하는 가게에 취업 했지만, 건설 현장이나 뱃일, 농사일, 허드렛일, 행상 등 돈이 되는 일은 가리지 않고 했다.

링링은 화교소학교에 취업해 아이들을 가르쳤다. 치관은 화교가 운영하는 음식점에 주방 보조로 들어갔다. 그때에 한국 사람들이 춘장에 볶은 짜장면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장을 담그는 기법과 요리 기술을 습득했다.



사람들은 질경이처럼 용케도 매서운 겨울바람을 잘 견뎌냈다
피란생활이 안정을 찾아가던 6월 말에 전쟁이 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느 볕이 좋은 가을날, 치관과 링링은 화교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양수이핑은 화교협회에 가입을 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국, 호주, 유럽 등에 뿌리내린 한족의 강인함을 설파하고 상부상조하며 살아갈 것을 권유했다.

사람들은 질경이처럼 용케도 매서운 겨울 바다 바람을 잘 견뎌냈다. 봄이 한창이던 5월 장미꽃 향기를 타고 인천 산 아기가 태어났다. 양수이핑은 외손자의 출생을 기뻐하며 '고향을 잊지 말고 강하의 용이 되라'는 뜻에서 왕강룡(王康龍)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렇게 피란생활이 안정을 찾아가던 6월 말에 전쟁이 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38선 이북의 인민군들이 쳐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양수이핑은 강하에서 온 사람들 중 어른들을 불러 모아 긴급회의를 했다. 그들의 의견은 극명하게 갈렸다.

"우린 국민당과 관계없으니 중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도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소?"

"원래 목적지인 타이완으로 갑시다."

"우린 죽든 살든 그냥 인천에 남겠습니다.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았는데..."

"공산당이 지긋지긋한데 차라리 일본으로 갑시다."

"한국 사람들 따라 부산으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잠자코 의견을 듣던 양수이핑이 결론을 내렸다.

"배 세척을 다시 띄우겠소이다. 타이완은 배가 낡고 멀어 갈 수 없소. 대양호는 고향 강하로 가도록 하고 나머지 두 척은 부산으로 행선지를 정하겠습니다. 필요한 살림살이만 정리하여 오늘 자정까지 배에 오르도록 하시오."

강하로 가는 대양호는 재회를 약속하며 먼저 떠났다. 해상호와 신양호는 자정을 지나 인원을 확인하고 부산으로 향했다.

다음 날 해가 떠오르자 사람들은 곤한 잠에서 깨어 아침을 맞이했다. 갑판 위에서 구름을 뚫고 바다 위로 솟은 해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소리 지르며 좋아했다. 그런 와중에 제트기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하늘 위로 향하는데 제트기 여러 대가 지나갔다. 순간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잠시 후 그 중 한 대가 다시금 돌아왔다. 사람들이 다시 손을 흔들고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하는데 제트기 날개에서 불꽃이 일더니 총알이 날아왔다. 제트기는 배를 향해 계속해서 기총을 쏘아댔다. 순간 아수라장이 됐다. 사람들은 아우성을 지르며 혼비백산하여 쓰러지고 넘어진 사람들을 밟고 기면서 배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포탄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객실 안은 총에 맞은 사람 가족들의 비명과 울음으로 가득 찼다. 링링의 품에 안겨 젖을 빨던 강룡이도 놀랐는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링링은 불안해하면서도 아이를 안아 얼렀다. 계속되던 포격 소리가 잠잠해졌다. 치관은 갑판 위로 올라갔다. 피 흘리며 신음하는 사람들과 주검이 되어 미동도 않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앞서 가던 신양호는 포탄을 맞아 크게 부서진 채 불에 타고 있었고 바다 위에는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부유물에 매달려 울부짖고 있었다. 잠시 후 사람들이 갑판 위로 올라와 부상자를 치료하고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신양호 사람들을 구조했다. 그런데 갑자기 격앙된 소리가 주위를 잠잠하게 만들었다. 해상호 선장이었다.

"누가 공산당 기를 달았어? 여기 신양호 갑판장 없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무리들 중에서 갑판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해서 죽을죄를 졌습니다."

제트기가 나타나자 소련 미그기인 줄 알고 잽싸게 청천백일기를 내리고 오성홍기를 바꿔 달았는데 그 제트기는 미국 공군기였다. 전쟁 물자를 실어 나르는 중공군 배인 줄 알고 공격을 한 것이었다.

갑판 위는 신양호에서 옮겨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부상당한 환자들의 신음 소리,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울음소리로 어수선했다. 설상가상으로 해상호도 기관이 고장 나 멈춰 섰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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