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정묵의 하루를 시작하며] '논어'(학이편, 제16장)에 기대어

[좌정묵의 하루를 시작하며] '논어'(학이편, 제16장)에 기대어
  • 입력 : 2019. 01.23(수) 00:00
  • 김경섭 기자 kks@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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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對話, dialogue)는 서로 마주하여 이야기를 주고받는 행위를 이른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이나 제주도의 문제들을 생각하면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타인과 마주하기도 쉽지 않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일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공소한 말이나 주장은 우리 주위에서 미세먼지처럼 떠돌아다녀도 서로 가까이 다가가서 귀를 기울이는 대화는 쉽게 찾아볼 수가 없다.

서로 대립하는 철학적·지적 입장을 신중하고 조직적으로 설명해가는 일도 대화라고 한다면 오늘날 단 한 편도 남아 있지 않지만, 오래된 것으로 시칠리아 무언극들이 있었다. 이 무언극들을 플라톤은 알고 있었고 훌륭하다고 생각했었다. 희곡이나 시나리오처럼 대화의 형식을 통해 논의를 전개하며 사상을 전달하는 고전, 또는 경전으로 '금강경'·'논어' 그리고 '대화편'을 들 수 있다. 희곡과 시나리오가 그렇듯이 이 경전과 고전에서도 특별한 사건들에 대한 현장감과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이 생생하게 드러나게 된다.

한자 문화권에 속한 나라들은 물론이고 중국의 사상을 직, 간접으로 수용한 나라들에서는 공자의 사상과 행적을 오랫동안 삶의 지표로 숭앙해왔다. 이런 공자의 사상과 행적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고전이 바로 '논어'라고 할 수 있다. '논어'는 모두 20편으로 구성이 되었는데 '학이편'은 그 중에서 처음 시작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내용과 주제를 제16장으로 나누어 공자의 행적 및 사상과 관련된 대화를 모아놓았다. 그런데 '학이(學而)'가 무엇인가. 배움이다.

'학이편'은 배움의 근본적인 목표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다. 처음 제1장과 마지막 제16장은 밀접하게 호응하며 배움의 궁극적인 지향인 '군자(君子)'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이인편'에도 추상적으로는 표현되었지만 '군자'에 대한 정의는 '예기(禮記)'(곡례편)에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선한 행동에 힘쓰면서 게으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내용이 보다 설득적이다.

제1장의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 , 不亦君子乎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군자답지 아니한가)"와 제16장 "불환인지부기지, 환불지인야(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의 군자는 바로 성인(聖人)이다. '학이'는 결국 '군자'로 가는 길이며, 성인으로의 지향을 설파한 공자의 사상과 닿아있다.

'학이편'을 요약하면 바로 이 두 구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짧지만 날카롭고 강렬하다. 흔히 내 말을 왜 못 알아듣느냐며 펄쩍펄쩍 뛰지만 그 전에 남의 말에 귀 기울여 본 적이 얼마나 있던가. 귀를 기울이며 사람 가까이로 다가서는 것이야말로 낭만이고 성인의 자질이다. 요즘 '소통'이니 '협치'니 하는 말들이 난무하지만 대화가 되지 못하는 까닭은 가까이 다가가거나 귀 기울이지 못하는 때문이다. 다가가는 것은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고 귀 기울이는 것은 타인의 생각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금강경'에서, 제자 수보리의 끝이 없을 듯한 질문에 가까이 다가가서 귀 기울이며 듣고는 다정하게 제자의 이름을 부르며 나직이 답하는 스승 싯다르타의 모습은 참으로 따뜻하지 않은가. 대화는 따뜻함의 전제로 수수하는 소통이고, 나아감이다. 배움의 길에서 군자와 성인으로 가는 방향이 이 따뜻함만으로도 융융(融融)하지 않은가.

<좌정묵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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