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30년 제주 30년] (34)중문 성천포구

[한라일보 30년 제주 30년] (34)중문 성천포구
관광단지 개발에 사라진 베릿내마을
  • 입력 : 2018. 12.13(목) 20:00
  • 홍희선 기자 hsho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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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과 베릿내 마을과 성천포구의 모습. 오른쪽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초가 4채가 베릿내 마을의 모습이며 왼쪽은 개발중인 중문관광단지의 전경이다. 강희만 기자 photo@ihalla.com

1987년 10여가구 주민들 뿔뿔이 흩어져

최근 베린내 마을과 성천포구의 모습.

30년 전 중문마을에서 남쪽으로 약 1㎞ 떨어진 해안가 자그마한 성천포구 인근에는 베릿내 마을이 위치해 있었다.

베릿내는 제주에서 불려온 고유어로 '벼로' '베리'와 개가 합쳐 만들어진 말이다. '벼로'는 낭떠러지의 험하고 가파른 언덕을 뜻하는 옛 말 중 하나로 천제연 폭포 일대와 베릿내 오름 일대에서 벼랑을 이루고 흐르는 내라는 뜻에서 베릿내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을 한자 차용표기로 '성천'으로 베릿내 앞 포구의 이름이기도 하다.

출항을 준비하며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베릿내 주민들.

베릿내는 10여채의 초가에서 20여명의 주민이 반농반어를 하는 작은 어촌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1987년 중문관광단지 개발로 관광단지에 통째로 수용됐다. 마을주민들은 집과 고향을 한꺼번에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중문관광단지를 비롯한 제주도내 관광지 개발에 따라 '신혼여행은 제주도'라는 이름을 남겼지만 베린내에는 애초 기획했던 제주전통의 민속마을 대신 제주 전통가옥 모습의 호텔로 변신했다. 이어 1990년에는 유람, 스포츠 또는 여가용 선박을 위한 항만시설이 들어서며 성천포구의 모습이 사라질 뻔도 했지만 어민들의 격렬한 반대로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게 됐다. 강희만·홍희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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