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훈의 한라시론] 고향무정

[김양훈의 한라시론] 고향무정
  • 입력 : 2018. 12.13(목) 00:00
  • 김현석 기자 ik012@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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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무정'은 1966년 발표한 오기택의 히트곡이다. 때는 도회지를 향해 하나둘 고향을 등지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그의 노랫말은 부평초 출향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잡초만 무성한 문전옥답과 어부들 노랫소리 들리지 않는 고향바다를 아파하던 타향살이들. 떠나버린 고향에는 지금 누가 살고 있는지, 멜로디는 머나먼 고향에 대한 먹먹한 안타까움이었다.

젊은 시절 힘들 때면 고향바다를 생각했다. 고향 바닷가는 샛바람 마파람 하늬바람 높바람이 계절에 따라 바뀌어 불었다. 눈을 감고 바람소리와 풍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힘들고 황폐한 도시의 일상은 위안을 받았다. 이처럼 고향생각은 마음속 피안의 이어도였다.

제주 섬나라에는 근 몇 년 동안 투기세력과 이주민이 몰려들었다. 오기택의 노래 고향무정의 가사와는 거꾸로였다. 대륙의 왕서방과 호떡장수 뿐만이 아니었다. 한반도로부터도 이주민의 열풍이 거세게 불었다. 이러한 변화를 미리 대비하지 못한 섬나라는 몸살을 앓았다.

급격한 변화의 부작용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옛적 제주의 시골은 도둑과 대문과 거지가 없는 삼무(三無)의 마을이었다. 너나없이 힘들었지만, 빈부의 격차는 종잇장 한 장이었다. 의식주의 처지가 모두 거기가 거기였다. 여유로운 집이라 할지라도 보리밥 먹는 이웃에 곤쌀 반지기 차려 먹는 게 그 차이였다. 배 곯은 사람은 있어도 배 아픈 소리는 별로 흔치 않았다. 마을마다 인심은 그저 소박하고 넉넉했다. 언제부터였을까? 투기 광풍이 불더니 사람들이 눈빛이 달라져 갔다. 버려졌던 곶자왈 자갈밭조차 하루가 다르게 값이 뛰면서다.

돌담으로 대충 경계를 지었던 곳은 새로이 경계선을 측량하느라 이웃사촌끼리 말싸움이 벌어졌다. 또 난데없이 남의 밭을 자기 땅뙈기라 우기는 일이 생겨나면서 법정 송사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치솟는 땅값에 소박했던 인심이 물욕으로 물든 것이다. 소송을 벌이고 법정 판결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것은 이웃끼리 못 할 짓이다. 인간이 빚는 탐욕은 추하다.

지난봄 느닷없이 법원으로부터 '소유권 이전 소송' 서류가 집으로 배달되었다. 소송을 낸 사람은 경찰간부 이력을 자랑하고 다니는 동네 선배였다. 경작지로 이어지는 농로의 반절이 자신의 소유라는 주장이었다. 눈뜨고 코 베어 가는 일은 도회지에서나 벌어지는 일로 알고 있었다. 동네 선배는 도의원까지 지낸 유지를 증인으로 내세우며 백면서생 같은 녀석쯤이야 하는 식이었다. 복덕방을 하는 초등학교 동창까지 친척인 원고의 주장을 거들어 주는 형편이었다. 이들의 주장을 법정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오만 정이 다 떨어지는 일이었다. 변호사는 "모든 게 땅값이 폭등하며 생겨난 탐욕 때문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전국 최고 수준의 부동산 가격과 주거비용 상승은 소득원이 제한적인 제주 이민자들의 삶을 더 어렵게 하고 있다. 삶의 질이란 무지개를 좇아온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다. 오버투어리즘에 따른 후유증에 대해 "왜 제대로 대비를 못했느냐"는 질문에 도지사는 "관광객을 내가 데려왔느냐"고 반박하며 전임도정과 국회의원에게 책임을 돌렸다. 이른바 '설거지론'이었는데, 설거지 꺼리는 널려만 간다. 아뿔싸, 최근 영리병원 문제까지 더해졌다.

그나마 잔불처럼 마음에 남았던 고향의 정이 사그라져간다. 시류의 탓이라지만, 마음속 고향 마을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속 쓰린 출향인의 마음을 달래 줄 고향 노래 어디 없을까? <김양훈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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