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동란의 제주’서 4·3의 참상 다시 본다

[사설] ‘동란의 제주’서 4·3의 참상 다시 본다
  • 입력 : 2018. 12.12(수) 00:0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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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을 타고 7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곳은 바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인 제주4·3의 현장. 당시 타지방의 한 신문이 '르포'를 통해서 4·3의 참상을 시리즈로 다룬 기사가 발굴됐기 때문이다. 4·3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본지 보도에 따르면 당시 '호남신문' 특별취재단은 1948년 6월 29일부터 7월 12일까지 14일 일정으로 제주를 방문해 총 7회에 걸쳐 '동란의 제주도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기획기사를 연재했다. 취재단의 방문 시기는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명시된 4·3 전개과정 중 5·10선거 직후인 초기 무력충돌기(1948년 5월 11일~10월 10일)에 해당된다.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기 직전의 제주 실상을 엿볼 수 있다.

이 신문은 제주읍에 이어 화북을 시작으로 도일주를 하면서 현장을 담아냈다. 학교 건물은 병사로 변하고 마을엔 청년들 하나 구경할 수 없고, 닭 한 마리 볼 수 없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억압되고 통제된 분위기 속에서 신음하는 도민들의 모습도 그려졌다. 산지항에서 만난 60대 노인은 "제주도 백성은 바다와 산에 생명을 의존하고 있는데 이제는 바다도 뺏기고 산도 뺏겨 살 수가 없다. 법 아닌 총검에 뺏겼다"고 어민들의 처참한 심경을 전했다.

특히 4·3사건의 발발원인이 일부 관공리와 사설단체의 탈선행위 등에 있다고 보도한 점이 눈에 띈다. 신문은 제주의 상황을 분석한 기사에서 "일부 관공리와 몇몇 사설단체의 탈선 행위가 이번 사건의 직접 원인은 안됐다고 하더라도 간접적 원인은 충분히 되고 있음을 당국 최고책임자도 시인하고 있다"고 썼다. 이어 "이번 폭동 수습에 대한 도민의 의견을 종합하면 육지에서 파견한 토벌대를 조속히 돌려보내고 민중의 원한이 싸여있는 사설단체의 행동을 시정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의 취재 시기는 4·3의 광풍이 휘몰아치기 전이다. 그런데도 이미 수백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호남신문 보도에 따르면 1948년 6월 15일까지 무고한 도민 292명이 사망하고, 9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두달여만에 300명 가까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는 폭풍전야의 서곡에 불과하다. 4·3으로 수많은 도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국가 공권력에 의해 무참히 희생됐기 때문이다. 정확한 사망자의 숫자도 모를 정도로 많은 도민이 억울하게 죽어갔다. 4·3이 발발한지 7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유족들의 눈물이 마르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정치권은 여전히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있다. 그나마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제주4·3특별법 개정을 계속 미루고 있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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