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영의 문화광장] 산타클로스 vs 김만덕 vs 해녀

[이한영의 문화광장] 산타클로스 vs 김만덕 vs 해녀
  • 입력 : 2018. 12.11(화) 00:00
  • 김현석 기자 ik012@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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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어린 시절, 이맘때가 되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명동이나 종로의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캐롤송이 울려 퍼지고, 자선냄비에 구세군의 종소리로 연말 연시 나눔의 훈훈한 분위기가 절로 무르익었다. 특히 아이들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가져다주실 선물의 기대로 한껏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와도 제대로 된 캐롤송 한번 듣기가 어려워졌다. 제주로 이주와서 그런가하고 가끔 서울사는 친구들에게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물어보니 상황은 비슷했다. 경기도 어렵고 얼마 전 상가의 음원 저작권 소송으로 업주들은 캐롤을 틀기 꺼려한다고 했다. 만일 캐롤을 틀다 소송에 휘말리게 되면 음원 사용료로 막대한 돈을 내야하기 때문이란다. 이러다가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그리고 그 정신인 나눔과 베품의 모습도 퇴색되어 가지 않을지 걱정이다. 과거 크리스마스하면 떠오르는 산타클로스는 사실 서기 280년 지금의 터키 지역인 파타라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수도자이다. 그는 상속받은 재산을 모두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후,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는데 훗날 카톨릭에서 성인으로 추대되어 매년 기일인 12월 6일 그를 기린다. 특히 네덜란드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세인트 니콜라스의 날을 기념하고 있는데, 산타클로스문화는 아메리카 신대륙에 이주한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세인트 니콜라스의 네덜란드식 발음과 함께 미국에 정착되었다.

제주도에도 산타클로스 못지 않은 나눔을 실천한 분이 계셨으니 바로 의녀 김만덕이다. 김만덕은 중개상인 김응열의 딸로 태어나 12세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기녀의 집에 의탁하였으나 어른이 된 후, 기녀가 천시받는 직업임을 알고 제주목사 신광익에게 탄원하여 양인으로 환원되었다. 양인이 된 만덕은 객주를 차려 제주 특산물인 귤, 미역, 말총, 양태(갓의 재료)를 육지의 옷감, 장신구, 화장품과 교환 판매하는 상업에 종사하여 거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하늘의 은덕이라고 여기고 검소하게 살았다.

1793년 제주도에 심각한 흉년이 계속되자 만덕은 전 재산을 풀어 쌀을 사 모두 구호식량으로 기부하였고 이로써 굶주림으로 죽어가던 제주도 민중들을 구원하였다. 당시 정조가 "여자의 몸으로 의기를 내어 기아자 수천 명을 구하였으니 기특하다."라고 칭찬한 것이 '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 정사 사료와 채제공의 '만덕전'(1797)등 여러 문헌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만덕의 선행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앞서 의녀 김만덕의 예처럼 제주사회는 늘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특히 제주해녀는 제주사회에 나눔과 베품을 몸소 실천하신 분들이다. 제주해녀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여성 노동공동체로서 과거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의 수탈에 항거해 항일잠녀투쟁을 이끈 사회개혁가였고, 60~70년대 일본에 해산물을 수출한 대한민국 수출의 역군이었으며, 어려운 시절 마을바당, 학교바당의 공동조업을 통해 그 수익으로 지역공동체 발전에 이바지했던 지역공헌가였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제주해녀가 우리사회의 일원으로서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당당하고 역동적인 직업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비영리법인 제주해녀문화보존회는 매년 제주해녀분들과 함께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를 하고 있다.

뜻깊은 연말연시의 의미를 되새기고 우리사회가 좀 더 따뜻한 사회가 되길 기원해 보는 의미에서 작지만 나눔과 베품의 실천으로 한해를 마무리 해봄은 어떨까? <이한영 제주해녀문화보존회장·교육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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