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직후 사회상 조명한 자료 찾아냈다

제주4·3 직후 사회상 조명한 자료 찾아냈다
호남신문 1948년 특별취재반 제주 파견
총 7회에 걸쳐 기획기사 형식 연속 보도
억압·통제 분위기 속 도민 인식 엿 보여
일부 관공리·사설단체 탈선이 간접 원인
  • 입력 : 2018. 12.09(일) 18:02
  • 송은범기자 seb1119@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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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당시 '호남신문' 특별취재단이 1948년 6월 29일부터 7월 12일까지 14일의 일정으로 제주를 방문해 총 7회에 걸쳐 '동란의 제주도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기획기사로 연재한 지면. 출처=국립중앙도서관

제주4·3사건 발생 직후 억압되고 통제된 분위기 속에 제주사회와 도민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발굴됐다.

 이 자료는 지난 6일 제주4·3도민연대가 개최한 '제주4·3 목포형무소 수형희생자 실태조사 보고회 및 제주4·3과 여순항쟁 70주년 기념토론회'에서 공개됐으며, 당시 '호남신문' 특별취재단이 1948년 6월 29일부터 7월 12일까지 14일의 일정으로 제주를 방문해 총 7회에 걸쳐 '동란의 제주도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기획기사를 연재한 것이다.

 이 신문은 제주읍에 이어 화북을 시작으로 도일주를 하면서 생생한 현장을 담아냈다. 학교 건물은 병사로 변하고 마을엔 청년들 하나 구경할 수 없고, 닭 한 마리 볼 수 없다고 당시 처참했던 실상을 전하고 있다.

 특히 사건의 발발원인이 일부 관공리와 사설단체의 탈선행위 등에 있다고 보도한 점 등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신문은 제주의 상황을 분석한 기사에서 "일부 관공리와 몇몇 사설단체의 탈선 행위가 이번 사건의 직접 원인은 안됐다고 하더라도 간접적 원인으로는 충분히 되고 있음은 당국 최고 책임자도 시인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이번 폭동 수습에 대한 도민의 의견을 종합하면 육지에서 파견한 토벌대를 조속히 돌려보내고 민중의 원한이 싸여있는 사설단체의 행동을 시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사설단체원의 불순한 정치적 모략은 순박한 양민까지 '빨갱이'라는 낙인을 씌우고 있다고 모 당국자가 말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일부 당국원 및 단체원의 취체로 그들의 감정을 격화시켜 급기야는 분화구 같은 험악한 공기를 조성하고, 이러한 분위기속에 2·7총파업이 벌어졌다고 언급했다.

 무장대의 무기가 보잘것 없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취재단은 "압수된 무기는 모두 패전왜병이 버리고 간 무기로 쓰지 못할 정도로 파괴된 것이 태반"이라며 "포로수용소에는 60세의 늙은 사람부터 20세 미만의 젊은 사람이 있었는데, 대부분 소박한 농민으로 보였다"고 설명했다.

 취재단이 제주 방문 시기는 많은 희생이 발생하기 전의 초기 무력충돌기에 해당한다. 사건의 배경과 초토화작전 등으로 무고한 주민이 희생당한 주민집단희생기(1948년 10월 11일~1949년 3월 1일) 직전의 제주도 실상과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이와 관련 4·3 추가 진상규명을 위해 당시 관련자료 발굴 등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박찬식 제주학연구소장은 "이 자료는 현재까지 공개되지 않은 것으로 주철희 순천대학교 교수가 발굴했다"며 "호남신문 취재단은 일반 주민은 물론 연대장과 기관장을 만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조명했으며, 특히 제주도민들이 탄압에 견디다 못해 봉기했다는 '항쟁적인 요소'가 담겨 있어 4·3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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