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만에 유골로 돌아온 다정했던 우리 오빠"

"70년 만에 유골로 돌아온 다정했던 우리 오빠"
유전자 감식 통해 작은오빠 찾은 양유길 할머니
1949년 처형되던 날… "오빠는 가라는 손짓만"
  • 입력 : 2018. 11.21(수) 19:07
  • 송은범기자 seb1119@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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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양유길 할머니가 제주4·3평화공원에서 큰 오빠 양해길·작은 오빠 양묘길씨의 위패를 손으로 가르키고 있다. 강희만기자

"오빠가 처형되던 날, 속옷만 입은 채 트럭에 실려 정뜨르 비행장으로 가는 모습을 서문통에서 봤어요. 눈이 마주친 순간 오빠는 말없이 손짓만 했습니다. 빨리 가라고."

 양유길(82) 할머니의 작은 오빠가 70년 만에 유골로 돌아왔다. 지난 16일 유전자감식을 통해 오빠의 유골을 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양 할머니의 큰 오빠 양해길씨와 작은 오빠 양묘길씨는 4·3의 광풍이 몰아치던 1949년 양 할머니를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서울로 데려오기 위해 제주를 찾았다가 차례로 군경에 붙잡혔다. 큰 오빠는 영문도 모른 채 마포형무소로 끌려가 행방불명됐고, 작은 오빠는 정뜨르 비행장에서 총살된 것이다. 당시 양 할머니는 12살, 오빠들은 대학생이었다.

 "큰 오빠는 육지로 끌려가 방도가 없었지만, 작은 오빠는 총살되기 전 제주농고 수용소에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는 곳에 돈을 써서 작은 오빠를 빼낼 수 있다고 했는데, 이틀 후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이 목격된 거에요."

 

지난 7월 10일 제주국제공항에서 4·3행방불명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한 개토제에 참석한 양유길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당시 양 할머니는 오빠의 유해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기 전이었다. 한라일보DB

양 할머니의 가족들은 작은 오빠의 시신이라도 수습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서슬 퍼런 당시 정권에서 보안 구역이라는 이유로 정뜨르 비행장의 출입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후 양 할머니는 제주를 떠나 전주와 서울에서 수 십년간 타향살이를 하다 2004년이 돼서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4·3에 대한 이야기는 가족에게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주에 돌아와 4·3의 참상을 다시 한 번 목도한 순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지금은 제주4·3희생자유족회 여성부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12살 소녀는 80이 넘은 노인이 돼서야 그리운 오빠를 찾을 수 있었다. 양 할머니가 기억하는 작은 오빠의 모습은 어떨까.

 "오빠는 내가 제주북초등학교에 다닐 때 항상 나를 업어서 등·하교를 시켜줬어요.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이제나저제나 오빠만 기다렸던 생각이 납니다. 묘길이 오빠는 참 다정했어요."

 양 할머니는 작은 오빠의 유골을 제주4·3평화공원에 마련된 봉안관에 안치할 계획이다. 수 십년간 땅 속에서 함께 뒤엉켜 있던 희생자들과 지내는 것이 더낫다는 판단에서다.

 "이제 유족들도 대부분 70세 이상이에요. 이념 논쟁을 떠나 하루라도 유족들의 품에 가족의 유해를 안겨줘야 합니다."

 양 할머니는 올해 다시 재개된 유해발굴사업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유해를 찾지 못한 유족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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