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4·3 학살 주범 '송요찬' 서술 논란

유시민, 4·3 학살 주범 '송요찬' 서술 논란
4·3 알리기 노력 불구 저서 '국가란 무엇인가'에
중산간 초토화 작전·민간인 학살 자행 계엄사령관
4·3 행적 빼고 "4·19 혁명 당시 시위진압 거부해"
  • 입력 : 2018. 11.04(일) 17:15
  • 부미현기자 bu8385@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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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국제공항 인근 4·3유해 발굴 현장. 사진=한라일보 DB

대한민국의 대표적 진보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방송과 출판계에서 맹활약 중인 유시민 작가가 자신의 저서에 4·3 당시 제주에서 초토화 작전을 지휘한 인물을 서술한 내용을 두고 적절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4·3 민간인 학살의 주범인 송요찬 9연대장의 일생 중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내용만 기술해 독자들의 오해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유 작가는 지난 2011년 출간한 저서 '국가란 무엇인가'를 보완해 2017년 개정신판을 내면서 초판에는 없었던 송요찬 관련 내용을 추가했다. 개정신판 서문에는 탄핵 정국으로 정치상황이 바뀌자 기존 책의 내용을 일부 수정하거나 덧붙였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진 건 없다는 설명이 따랐다.

 유 작가는 책에서 "권력자들은 혁명의 위기에 봉착하면 이 외적인 힘을 내부로 돌려 국민의 저항을 분쇄하려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 4·19혁명 때 이승만 정권이 그렇게 하려다 실패했다. 송요찬 장군이 이끈 계엄군이 시위진압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반면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때 전두환의 신군부는 군대의 힘을 동원해 시민들의 저항을 유혈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고 기술했다.

 유 작가는 이어 "군 지휘관들이 군대가 정부의 소유물이 아님을 선언하고 정부의 명령 이행을 거부하면 정부가 무너질 수 있다. 1987년 6월 전두환 정부는 그런 사태가 두려워 계엄령을 내리지 못했다. 2016년 초겨울 촛불을 든 100만 군중에 포위되었던 박근혜 대통령도 군대를 동원하지 못했다. 군 지휘관들이 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라는 명령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서술했다.

 이 글에서 언급된 송요찬은 2003년 정부가 최종 확정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기록된 송요찬과 동일인물이다. 진상보고서에 따르면, 송요찬은 1948년 10월 제9연대장 재임 시 강경진압작전의 신호탄인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어 11월에는 계엄사령관에 임명돼 중산간마을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면서 대량학살을 지휘했다.

 송요찬은 4·3 행적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6·25 전쟁 영웅으로 추앙됐고 육군참모총장, 국방장관,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승승장구했지만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 정부의 4·3 진상보고서가 확정된 이후 재평가가 이뤄졌다. 그런데 유 작가는 국가의 합법적 폭력을 설명하는 과정에 4·19 혁명을 언급하면서 송요찬 당시 계엄사령관이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해 결과적으로 유혈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내세웠다.

 4·3 유족회 회장을 역임한 양윤경 서귀포시장은 "송요찬은 4·3 때 절대적 희생자를 낸 장본인이다. 송요찬에 대해 쓰려면 잘못된 점도 지적해줘야 한다.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은 송요찬 '대단한 사람'이다 할 것"이라며 "4·3유족들은 지금 송요찬의 출생지인 청양군이 선양사업 국비를 요청한 것도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공인이라면 독자들이 제대로 알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4·3을 연구해온 고성만 제주대 사회학과 조교수도 "제주도 입장에선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군인과 정치인을 다른 지역에서는 의인으로 평가하는 일들이 왕왕 있다"면서 "4·3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이 한국 중심에서 제주도 중심으로, 거시사에서 미시사적 관점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밝혔다.

 평소 제주4·3 알리기에 앞장선 유 작가는 4·3 70주년을 맞은 올해 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추진한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캠페인에 참여했고 방송에서도 4·3 알리기에 동참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과 달리 책을 통해서는 송요찬이 4·3 때 이승만 대통령의 계엄령 지시를 이행하고, 그 이후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사실을 독자에게 전하지 않아 논란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에 대해 유 작가는 "단지 4·19혁명의 과정을 서술하면서 송요찬 장군이 시민들의 시위에 대한 무력 진압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적시했을 뿐이다.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한 것도 아니고 그의 일생을 조명한 것도 아니다. 4·3에 대한 저의 생각은 여러 글이나 방송을 통해 누차 밝힌 바 있다"며 "국가권력의 물질적 기초가 군대의 물리력이라는 점을 논증하기 위해 4·19 당시 계엄군의 시위진압 거부를 사례로 들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표성준·부미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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