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훈의 한라시론] 한라산 통일맞이

[김양훈의 한라시론] 한라산 통일맞이
  • 입력 : 2018. 10.11(목) 00:00
  • 김현석 기자 ik012@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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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옛말에 백두에서 해맞이를 하고 한라에서 통일을 맞이한다는 말이 있다." 리설주 여사가 지난 3차 남북회담 당시 백두산 정상 장군봉에서 한 이야기다. 어디서 들은 옛말인지 알고 싶다. 그러나 알 길이 없다. 그런데 '한라의 정기'를 받은 사람이 통일의 영웅이 될 것이란 말은 들은 적이 있다. 함석헌 선생의 예언이었다. 함석헌 선생은 해방 후의 새 나라를 처녀지와 같았던 맑은 섬 제주로 상징하였다. 1938년에 발표한 정지용의 詩 '백록담'은 한라산에 어린 맑은 민족의 생기를 오롯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민족분단의 상징처럼, 두 사람의 운명은 한국전쟁을 전후해 한 사람은 남쪽, 한 사람은 북쪽으로 영영 엇갈렸다.

한국전쟁기에 납북된 정지용의 詩 '백록담'은 이렇게 첫 연(聯)이 시작된다.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꽃 키가 점점 소모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스러지고 다시 한 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옷 내다본다. 화문(化紋)처럼 판 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星辰)처럼 난만하다. 산 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예부터 한라산은 올라가기 어려워 사람들은 백록담 정상을 오르자마자 기진맥진하였다. 바람의 차기도 함경도 끝과 맞선다 하지 않는가? 함석헌 선생은 해방공간의 혼란과 이념의 극한대립, 전쟁의 비극을 겪으며 절망한 나머지 이렇게 한탄하였다. '그 눈앞에 빤한 한라산이 왜 그리 올라가기 어려운가?' 일찍이 간단치 않은 통일의 길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함석헌 선생은 1950m의 한라산 높이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주목했다. 함석헌 선생이 쓴 책 '뜻으로 본 한국역사-흐린 물결은 지나가고' 편에서 6·25 한국전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우리가 감히 예언하자는 것이 아니었지만 예언이 되지 않았나? 30년 전 이 역사를 쓸 때 남해 물밑을 지난 다음에 제주도가 있다 했는데, 정말 우리는 지금 있던 것을 다 내버리고 알몸으로 제주도에 올라왔다. 하필이면 왜 제주도 한라산은 1950m로 되었나? 1950년이 전쟁으로 새시대 새 나라가 시작되는 것을 표한 것 아닌가?'

이제 와 '한라산 정기'란 무엇일까? 1950년 이래 고착된 분단을 극복하는 시대정신이 아닐까? 제주신화의 영지(靈地)인 백록담은 해방공간에서 벌어졌던 한국 현대사의 참극, 제주4·3의 현장을 생생하게 지켜보았다. 이념과 증오, 전쟁과 학살로 점철된 역사가 한라산을 피로 물들였다. 엄혹한 시절, 시인 이산하는 그의 장시(長詩) '한라산' 첫머리에서 한라산을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이라 분노하였다.

이제 통곡과 분노를 뛰어넘을 때다. 한라산의 마음은 백록담 정상에서 분단된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제사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올해 안 서울방문이 가시권에 들어오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쓴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액자가 최근 청와대 여민관 복도 벽에 걸렸다. 서울남북정상회담에 임하는 청와대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다. 주변 강대국들만 계산기를 두드리는 게 아니다. 정파(政派)마다 이해타산을 두드리는 북소리가 요란하다. 아무도 가보지 않는 두려운 길을 걷고 있는 두 정상에게 '한라의 정기'가 필요하다. <김양훈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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