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제주사회 소송으로 권리구제했다"

"17세기 제주사회 소송으로 권리구제했다"
고문서학회·제주학센터 '고문헌 통해 본 조선시대 제주' 학술대회
제주목 결송입안 오결 정소 등 살펴… "소송 당사자 높은 법률 지식"
  • 입력 : 2018. 10.05(금) 20:59
  • 진선희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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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문서학회와 제주학연구센터가 주최하는 '고문헌을 통해 본 조선시대 제주' 주제 학술대회에서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 진선희기자

17세기 제주사회 소송 양상은 어땠을까. 조선시대 소송에서 승소한 사람에게 그 사실을 인증해준 '결송입안(決訟立案)'을 통해 제주 사람들의 법 수준 등을 들여다본 자리가 있었다. 한국고문서학회(학회장 양진석)와 제주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센터장 박찬식)가 주최·주관하고 제주도와 한라일보사가 후원한 '고문헌을 통해 본 조선시대 제주' 주제 학술대회다.

5일 제주아스타호텔에서 진행된 학술대회에서 한상권 덕성여대 교수는 1629년 제주목 결송입안을 중심으로 '제주도 오결정소(誤決呈訴)의 양태'를 살폈다. 이를 통해 한 교수는 당시 제주목 소송 당사자들이 높은 법률적 지식을 습득했고 소송을 권리 구제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가 분석 대상으로 삼은 결송입안은 강계남과 처제 부씨가 원고이고 강계남의 처사촌 등이 피고로 참여해 노비 소유권을 다투는 자료다. 소송 기간은 약 2개월이었고 결송관은 제주목사 박명부였다.

이 소송의 원고는 전임 목사 성안의의 판결에 맞서 당사자 평등의 원칙, 변론권, 증명권 등을 내세우며 그것이 오결임을 주장했다. 한 교수는 이를 두고 높은 수준의 법리 논쟁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봤다. 하지만 원고는 송관과 형리와의 유착 관계를 문제삼으면서도 자신에게 패소 판결을 내린 송관을 기피신청하거나 소송을 다른 고을로 옮기는 이송 신청을 하지 않았다.

오결 정소에 대해 이전 판단을 뒤집는 건 다른 고을에 이송해서 일어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럼에도 이 소송건은 후임 제주목사가 전임 송관인 성완의 목사의 판단을 파기했다. 한 교수는 "이는 오결정소에서 재송관이 다른 소송 절차에서 다른 법관이 내린 판단 즉 선례에 구속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김현영 낙산고문헌연구소장은 '변방 노비의 처지와 관리: 1662년 제주목 결송입안의 검토' 발표에서 "소송 내용을 통해 제주의 사노비들은 같은 지역 상전의 수탈을 피하고자 서울 권세가에 투탁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제주와 함경도와 같은 변방 지역은 직접 추심(推尋)이나 징공(徵貢)이 힘들어 거의 관리가 되지 않았고 이를 둘러싸고 많은 쟁송이 벌어졌다"고 밝히며 이런 상황에서 그 지역의 사노비들을 국가에서 매입해 공노비로 만들고 군적에 편입해 변방의 경계와 국가의 재정을 강화했다고 덧붙였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이와함께 '1411년 제주도 간본 '논어'의 서지학적 연구'(김민현, 한국학중앙연구원) , '조선후기 제주지역 임명문서 검토'(조정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주민의 서울민과의 원거리 소송을 통해 본 조선의 사법 행정'(박경, 연세대), '제주민의 재산상속 소송과 서증(書證)'(김경숙, 서울대)에 대한 주제 발표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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