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정묵의 하루를 시작하며] 삶의 현장에서 축제를 찾자

[좌정묵의 하루를 시작하며] 삶의 현장에서 축제를 찾자
  • 입력 : 2018. 09.05(수) 00:00
  • 김현석 기자 ik012@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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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1차 산업의 총생산량은 그 재화와 관계없이 제주도민들에게는 중요한 가치다. 왜냐 하면 삶의 방향이고 거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도 감귤, 당근, 양배추, 마늘 등의 수확으로 인한 축제가 자생적으로 한 지역을 대표하며 형성되지 못했을까. 관광의 포커스도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고, 마땅히 변화되어야 한다. 이제 제주도는 도민이 주체가 되어 축제가 되는 삶을 돌아볼 시대가 되었다.

제주도에서 해녀의 위상은 이름만으로도 제주도의 삶을 대표할 만하다. 만약 해녀축제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 주체는 해녀가 되어야 한다. 최근 해녀축제의 내용을 보면 '해녀 학술대회(한국문화재재단)', '해설 있는 해녀굿', '새내기해녀물질대회', '불턱가요제', '바릇잡이 체험', '싱싱 수산물 시식회' 등이었다. 몹시도 안타까운 것은 여기 어디에도 지금 노령의 해녀들이 주체가 되는 행사 내용은 없다.

해녀의 삶이 제주도의 역사와 함께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인식이라면 섬과 바다, 척박한 화산재와 거친 바람, 저승 같은 열길 물길과 삶의 꿈 등이 바로 해녀들의 입에서 표출되어야 한다. 오랜 역사 속에서 생명을 담보로 어떻게 삶의 조건을 확대하며 살아왔는지의 정서들이 표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아직도 해녀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며 삶을 살아가는 분들에게 위안이 되고 때로 기쁨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것이라야만 축제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해녀축제만이 아니다. 유채꽃축제와 벚꽃축제는 봄이 되는 때에 제주도 전역에서 마을 사람들의 소박한 행사 정도여도 좋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제주도 어디를 가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 이런 때에 특정한 장소로 사람들을 몰려가게 하는 일은 제주도의 진면목을 흐리게 하는 관광 정책이며, 이를 통해 축제의 이름을 부여했다면 제주도의 가치가 치장과 과장으로 왜곡되고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로부터 결국은 외면을 받게 될 것은 뻔하다.

최근 70주년을 지나며 '4·3'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브라질의 삼바 카니발의 태동은 흑인 노예들의 정서 표출에서 비롯되었다. 비록 '4·3'이 우리 근대사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고 해도 극단적 슬픔 속으로 빠질 이유가 없다. '4·3 유적 길'을 정비하고 후손들에게 알리며 제주의 역사를 관광자원화 하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리고 이런 방향의 축제가 문화 현상으로 발현된다면 참 좋은 일이다.

브라질 흑인 노예들이 핍박과 폭력, 심지어는 비인간적인 죽임을 당했어도 그들의 삶의 노래는 축제가 되었다. 그들의 아우성에는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류 통성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제주도가 '4·3 유적 길'을 정비해서 교육의 장으로 삼든, 아니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든지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메시지의 표현이다. 목숨과 삶의 조건을 잃지 않고 확대하려 했던 인간적인 정서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오랜 시간의 변화와 현재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삶의 현장을 통한 축제는 지향해야 할 제주도의 과제이면서도 혁명처럼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문화의 꽃이 그렇듯이 오랜 시행착오와 단련을 통해 전통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오늘의 문제의식으로 부단히 그 방향성을 모색하는 과정 속에서 제주도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현재의 삶이 메시지가 되는 축제는 발아하게 마련이다.

<좌정묵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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