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연의 문화광장] 하얀 밤과 한밤의 태양 안에서

[이나연의 문화광장] 하얀 밤과 한밤의 태양 안에서
  • 입력 : 2018. 08.28(화) 00:00
  • 김현석 기자 ik012@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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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스타방게르의 한 카페에 앉았다. 호숫가를 산책하는데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가방 속 랩탑이 젖을까 걱정돼 가까운 카페에 들어왔다. 호수를 떠다니던 백조와 오리들은 피할 곳을 찾지 못해 온몸으로 비를 받아내고 있다. 우산을 준비못한 행인들은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누군가는 우산을 꺼내어 펼치고, 장식이던 후디가 머리 위로 올라간다. 따뜻한 차를 한 잔 시켜두고, 이제 나랑은 상관없어진 것 같은 우중 창밖을 보고 있는데, 카페 점원은 벌써 의자정리중이다. 그러고보니 몇시야? 하고 시간을 보니 밤 8시. 해질 무렵의 오후가 아니라 밤의 시작점인데 아직도 창밖은 조금 흐릴 뿐, 대낮처럼 환하다. '백야'다. 이 지구과학적인 자연현상을 러시아에서는 '하얀 밤(white night)', 북유럽에서는 '한밤의 태양(midnight sun)'이라 부른다. 거기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례없이 밝은 동명의 연애소설은 이 단어에 낭만적인 이미지를 더해줬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은 어둡고 심각한 듯하고, 길고 발음이 어려운 러시아식 주인공 이름은 읽어도 누가 누구인지 모르고 끝나버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의 초기작 '백야'는 퍽 사랑스런 소설이다. 자기를 잔인하게 차 버린 연인에게 소설 속 주인공이 쓴 편지의 문장들이 이런 식이다. "네 하늘이 청명하기를, 네 사랑스런 미소가 언제나 밝고 평화롭기를, 행복과 기쁨의 순간에 축복이 너와 함께하기를!" 요즘 말론 어장관리를 당하다가, 결국 깨끗이 정리된 이 쑥맥남은 정신승리를 거두며 "어쨌든 나의 밤은 낮보다 아름다웠다"라는 대사도 뱉어낸다. 4일 밤 동안 지속된 짧은 사랑, 어쩌면 길었던 밤 탓에 짧지 않았을지도 몰랐을 연애는, 성숙한 실연남의 긍정적인 사고방식 덕에 아름답게 끝났다.

북유럽의 여름은 밤 10시쯤 되어서야 해가 떨어질 준비를 하고, 새벽 4시 무렵이면 벌써 여명이 밝아온다. 러시아에서는 하얀 밤이었던 시간이, 이 곳에서는 한 밤에 태양이 떠 있는 상태. 늦은 시간까지 뭐든 할 수 있을듯한 가능성이 충만한 느낌이지만, 비싼 물가 탓에 밖에서 오래 놀기는 어렵다. 8시면 문 닫을 채비를 하는 이 카페를 보라. 한 밤의 태양과 함께 무엇을 하라고 이러는 걸까. 술값도 담뱃값도 음식값도, 즐거운 시간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비싼 이곳의 친구들은 대안을 집 안에서 찾는 모양이다. 정성들여 집을 꾸미고, 직접 요리를 하고, 시간이 더 많아지는 주말엔 가족이나 친구들과 별장에 놀러간다. 별장에서 보트를 타고 하이킹을 하고 캠핑을 한다. 무료인 자연에서의 놀이 외에 소비하는 모든 것들이 비싸서인지 대체로 절제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다. 늦게까지 술 먹고 노는 이들은 관광객들인듯 하고, 길거리엔 담배피는 이들도 좀체 없다. 그 대신, 마시는 깨끗한 물은 공짜, 청명하고 맑은 공기는 공짜다. 한밤의 태양 속에서 생활에 가장 필요한 것들의 안전함을 보장받는다. 지금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순간적인 욕망은 절제한다. 어쩌면 이 인내는 다음 세대를 위한 유희의 유예인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에 반하는 행동들인 거 같아서 조금 통쾌하기까지 하다. 이 나라 이 도시들에선 "네 하늘이 청명하기를, 네 사랑스런 미소가 언제나 밝고 평화롭기를, 행복과 기쁨의 순간에 축복이 너와 함께하기를!"이라는 문장을 자꾸 곱씹게 된다. 지구와의 연애는 자연과의 삶은 4일만에 끝나진 않을텐데,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하는걸까? <이나연 씨위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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