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성 선생님을 추모하며…

심우성 선생님을 추모하며…
  • 입력 : 2018. 08.27(월) 18:51
  • 진선희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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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1인극의 거장'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이 별세했다. 심규호 제주국제대 석좌교수가 고인을 기리는 글을 보내와 싣는다. …○



1983년, 서울 대학로 소극장. 성근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장년이 춤을 추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허리에 머리가 둘 달린 인형을 매단 채 익숙한 가락이 어울리며 보는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들뜨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 분의 얼굴이 무언이 얼마나 큰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웅변하고 있었다. 그 살벌한 시대에 그 분은 몸과 인형, 그리고 음악으로 통일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춤추며 절규하고 있었다. 쌍두아(雙頭兒), 이미 고전이 된 심우성 1인극의 첫 번째 작품이자 대표작이다.

공연이 끝난 후 흥분하여 분장실로 달려가 선생님을 만난 기억이 새롭다. 그때부터 나는 선생님의 학생이 되었다. 왜 하필이면 인형극, 그것도 1인극을 고수하시는지, 조선의 탈이 왜 거의 대부분 웃고만 있는 것인지? 민속이란 민중 의식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민족적 형식이라는 것도, 민중의 문화를 그 대상으로 하여 민중의 거짓 없는 생활사의 줄기를 보는 학문이 바로 민속학이란 것도 모두 선생님에게 귀동냥하여 얻은 지식이다. 어디 그것뿐이랴. 덕분에 귀주(貴州)의 나희(儺戱)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난생 처음 해외공연을 하기도 했으며, 동문선 출판사에서 번역서를 서너 권 출판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배우이자 학자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까닭을 알려주셨다는 점이다. 선비와 광대라! 이 기묘한 결합을 당신께서 몸소 보여주셨으니 어찌 두려워할 것인가?

공주가 고향이신 선생님은 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나 휘문중학 재학시절에 한국전쟁을 겪었다. 인민군훈련소에 잡혀가는 불운과 심한 배탈로 인해 지리산으로 올라가라는 인민군대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된 행운이 겹치면서 구사일생으로 고향 공주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만난 이가 바로 남사당패 꼭두쇠 출신인 정광진이다. 이 운명적인 만남이 선생님을 남사당패 연구자로 변신시켰고, 남사당패 출신인 김덕수가 창설한 사물놀이패의 이름 '사물놀이'를 명명하게 만들었다. 선생님은 광대로서 쌍두아, 문, 일본군 위안부 아리랑까지 여러 1인극 작품을 직접 연희하였으며, 학자로서 하루도 쉬지 않는 집요한 성실함으로 '남사당패연구', '한국의 민속극' 등을 저술하셨다. 국립박물관 수장고에 잠자고 있던 제주 입춘굿 탈놀이의 사진을 처음 발견한 것도 선생님이다. 2006년 제주에 사시겠다고 내려오셨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방대한 선생님의 자료를 둘 곳이 제주에 없다는 사실에 얼마나 슬펐는지. 선생님은 고집스럽지만 외곬이 아니었으며, 세상을 가슴 가득 품으셨지만 세상물정에 얽매이지 않으셨으며, 그 흔한 호(號)조차 알려주시기 않은 채 떠나셨다. 홀가분하실까? 이제 당신이 그토록 바라시던 남과 북이 너랑 나랑 아리랑으로 하나가 되는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웃음 지으실까? 오호, 애재라! 선생님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 따름이다. <심규호 제주국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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