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훈의 한라시론] 첼리스트 노회찬, 그의 울림

[김양훈의 한라시론] 첼리스트 노회찬, 그의 울림
  • 입력 : 2018. 08.09(목) 00:00
  • 김현석 기자 ik012@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이제껏 정치인의 죽음에 조문을 한 적이 없다. 별다른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날은 노회찬 의원의 빈소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집에만 그냥 있기에 가슴이 답답했다. 대학병원 지하 2층에 자리 잡은 장례식장은 시민 조문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연일 찌는 가마솥 폭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민들은 노회찬 의원의 빈소를 찾았다.

세 줄로 맞춰 늘어선 긴 조문 행렬은 느리게 조금씩 나갔다. 시민들의 표정은 모두 하나같이 안타까움이었다. 행렬을 이룬 사람들은 말없이 무언가를 속으로 삼키고 있었다. 옆에 선 중년의 부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표정이었다. 조문객이 계속해서 꼬리를 물었다. 행렬은 벽에 막혀 두 번을 굽이 돌았다. 조문객이 몰려 15명씩 한 번에 빈소로 들어가 묵념을 하고 나왔다.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무반주 첼로 연주곡의 느린 흐느낌과 같았다. 무거운 울림이 가슴을 흔들었다. 정치인 노회찬은 수준급의 첼리스트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회찬에게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 어울린다. 학창시절부터 혁명을 꿈꾸던 그였다. 그가 살아온 삶을 보면 그렇다. 그래서 정치인 노회찬이 첼리스트라니 언뜻 생뚱맞다. 그러나 어린 시절 노회찬은 부모님이 만들어 준 남다른 문화예술의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의 부모님은 부산 피난민 시절, 한 칸짜리 길거리 사글셋방에 살면서도 가끔 오페라를 보러 다닐 정도의 문화 취향을 가진 분들이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으려 한다. 그는 중학교 때 부산시립교향악단 첼로 수석에게, 고등학교 때는 국립교향악단 첼로 수석 연주자에게 첼로 과외를 받았다. 클래식 음악에 심취한 그는 한때 음대 진학을 고민하기도 했다.

노회찬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정치에 입문했다고 말했다. 11인치 나팔바지를 입고 유신반대 데모를 했던 그는, 학교에서 배운 것과 사회현실이 다른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가 일찍이 사회현실에 몸을 던진 이유였다. 학업을 마친 그는 첼로 활 대신 용접기를 잡았다. 불의한 시대를 통과해야 했던 가슴 뜨거운 젊은이의 선택이었다. 그의 중학교 친구들은 남달랐던 그를 '노괴물'이라 불렀다. 그의 별명대로 괴물의 삶은 안락하거나 평탄하지 못했다.

첼로는 인간의 목소리에 가장 가까운 악기다. 첼로는 깊은 내면의 저음(低音)을 묵직하게 들려준다. 그러면서 다양한 음을 내는 악기다. 이를테면, 노회찬의 첼로는 새벽 4시 첫출발하는 6411번 버스 승객들의 하소연 같은 사회 밑바닥의 소리도 담아낼 수 있다.

'첼로를 켜는 노회찬'이란 책에서 홍세화는 말했다. "그 또는 그와 같은 정서의 소유자가 시청이나 국회, 또는 청와대에서 첼로를 켜는 모습을 꿈처럼 그려본다. 파블로 카잘스나 로스트로포비치 같은 거장이 아니더라도 정치인이기에 멋지지 않은가."

대부분의 정치인은 자기 잇속 챙기기에 바쁘다. 모함과 특권에 능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노회찬은 이 땅의 노동자와 차별받는 사람들, 소수자와 약자들의 대변자였다. 천하에 나면서부터 귀한 자는 없다(天下無生而貴子也),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이다. 그는 때로는 공자왈(孔子曰)로, 어느 때는 예수의 비유로 이 불의한 세상을 고발했다. 그러나 정치인 노회찬은 젊을 적 꿈꾸었던 '정의로운 세상'을 이루지 못하고 비극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그는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다. 그가 행동으로 보여준 낮은 삶은 모두에게 위로였다. 그에 대한 추모의 여운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한동안 첼로 연주곡을 즐겨 들어야 할 것 같다. <김양훈 프리랜서 작가>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6044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