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6·25전쟁 제68주년] ‘18살 소대장’ 참전용사 오동진옹

[오늘 6·25전쟁 제68주년] ‘18살 소대장’ 참전용사 오동진옹
"나라위해 희생한 영웅들 잊어선 안돼"
  • 입력 : 2018. 06.24(일) 20:00
  • 송은범 기자 seb1119@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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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18살의 어린 나이에 소위로 임관해 전쟁터를 누빈 오동진(85)씨가 사진첩을 보여주며 당시 상황을 들려주고 있다. 송은범기자

중 2학년때 자원입대… 창군이래 유일 10대 소위
전우 40명 이끌고 고지쟁탈전중 폭탄 파편 맞아
휴전후에는 맹호부대 제1진으로 월남전도 참전

한국전쟁 당시 최전방을 종횡무진 누비던 '18살 소대장'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됐지만, 아직도 그의 눈빛에는 나라를 위해 싸웠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제주 출신으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모두 참전한 오동진(85)씨를 6·25전쟁 68주년을 맞아 제주시 화북동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7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당시의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제주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오씨는 1952년 2월 20일 18살의 나이에 자원입대했다. 당시에는 문맹자가 많았던 터라 오씨는 글을 안다는 이유로 사병이 아닌 하사관교육대에서 3개월 간의 훈련을 받고 '이등중사(병장)' 계급장을 달게됐다.

이후 곧바로 장교 후보생 모집 공고가 나왔다. 하지만 당시 18살이었던 오씨는 '20세 이상'이라는 제한 기준 때문에 지원을 할 수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나이를 속여 지원서를 제출해 시험에도 합격했습니다. 다행히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고, 1952년 10월 11일 창군 이래 유일한 18살 소위가 됐습니다."

18살 소위의 첫 임무는 소대원 40명을 인솔해 최전방 강원도 인제군 서화리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1952년은 휴전협정이 한창 이뤄지던 시기로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남과 북 모두가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벌이던 때였다. 한국전쟁에서 400만명의 사상자가 나왔는데 이중 300만명이 이 고지쟁탈전에서 희생됐다.

"소대원들은 나보다 전부 나이가 많았고, 떨어진 군화 밑창을 칡 덩굴로 묶고 싸우는 등 보급도 형편이 없었어요. 하지만 제일 힘들었던 것은 언제 북한군이 습격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에요. 그래서 임무 외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소대원들을 격려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습니다. 차라리 공격하는 것이 나을 정도였어요."

열악한 상황에서도 오씨는 분전을 거듭 했지만, 결국 부상을 당하고 만다. 고지를 탈환하는 작전에 투입돼 왼쪽 팔에 관통상을 당하고, 네이팜탄이 팔에 달라붙어 화상을 입었다. 하체에는 폭탄 파편이 꽂혔다.

"네이팜탄이 몸에 붙으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절대 불이 꺼지지 않아요. 그만큼 연소력이 강력한 물질입니다. 결국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습니다."

오씨는 수개월의 치료를 마치고 다시 복귀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될 때까지 전장을 지켰다. 이후 1965년 맹호부대 제1진으로 월남전에 참전하는 등 대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30여년 동안 군생활을 이어갔다. 이 기간 받은 훈장과 표창만 해도 15개나 된다.

군복을 벗은 뒤 오씨는 고향인 제주로 돌아와 여태껏 살고 있다. 치열한 전장에서 40명의 전우를 이끌던 18살 소대장은 이제 80을 훌쩍 넘긴 노병이 됐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전쟁은 겪어본 사람 만이 그 참혹함을 압니다. 부디 전우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해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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