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훈의 한라시론] 조정철 목사를 생각하며

[김양훈의 한라시론] 조정철 목사를 생각하며
  • 입력 : 2018. 05.31(목) 00:00
  • 김현석 기자 ik012@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조선개국 후 제주 목사(牧使)로 부임했던 인물은 모두 282명이다. 고려시대부터 시작한 목제(牧制)는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는 1906년 폐지되고 제주목사가 맡던 사무는 전라남도 관찰사에게 인계되었다. 정의군과 대정군은 제주군으로 통합되어 제주도 전 지역은 전라남도 관찰사 직할이 되었다.

때가 때인지라 이런 생각을 해봤다. 조선시대의 제주목사 가운데 가장 매력이 있는 도백은 누구였을까? 사람마다 보는 눈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주저함이 없이 정헌(靜軒) 조정철(趙貞喆) 목사를 꼽겠다. 조정철 목사의 집안은 할아버지부터 자신까지 3대가 제주유배를 온 진기록을 남겼다. 그는 제주여인 홍윤애가 목숨 바쳐 지킨 인물이기도 하다. 앞날이 창창했던 명문거족의 스물일곱 살 귀공자는 정조 시해음모에 연루되면서 하루아침에 대역죄인이 되었다. 그는 27년 동안의 혹독한 제주유배생활을 견디며 살아남았고, 유배가 풀린 후 제주목사로 바다를 건너 왔던 파란만장한 사나이였다. 그가 편찬한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에 시(詩) 635수로 유배생활의 기록을 남겼다.

육지유배를 포함해 29년의 기나긴 유배를 끝낸 후 마침내 관직에 등용된 조정철은 순조 11년인 1811년, 환갑의 나이에 제주목사 겸 전라도방어사를 자원했다. 조정철 목사는 제주에 부임하자마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홍윤애의 무덤을 찾아 통곡하고 추모시를 비석에 새겼다, 목사 신분인 조선의 사대부가 한 여인을 위해 위령제를 지내며 묘갈명에 '의녀'라 존칭함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조선은 그런 시대였다. 잘못하면 탄핵으로 관직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홍윤애의 죽음을 앞두고 이모 품에 안겨 애월읍 산새미 오름 절간으로 피신한 후 곽지리에서 성장한 딸과도 감격적인 만남을 가졌다. 조정철은 제주목사 재임 중 받은 녹봉을 모두 딸의 농토를 사는데 썼다. 이후 조정철은 혼례를 올리지 않은 홍윤애를 자신의 부인으로 호적에 올렸다. 이처럼 조정철은 시대의 누추함을 깨어버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조선의 사나이였다.

조정철 목사의 제주 재임기간은 1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27년이란 유배생활을 통해 제주섬 민중의 밑바닥 삶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그는 짧은 재임기간 동안 백성들에 대한 부당한 세금과 과중한 부역, 아전들의 재물착취를 시정하였다. 조정철 목사는 육지지방으로 임지를 옮긴 후에도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여러 곳에 그를 기리는 송덕비가 세워졌다. 하나를 알면 열을 안다. 사나이 조정철은 시대를 앞서가는 선구적인 휴머니스트였다.

해방이후, 1946년부터 중앙정부의 관선에 의해 제주도지사가 임명되었다. 그 숫자가 30명이다. 1995년 이후 민선에 의한 선출직 도지사는 지금껏 4명이다. 선거로 뽑힌 제주지사는 모두 제주 출신이고, 후보자들도 모두 제주를 고향으로 둔 인물들이었다. 이번 6·13 지방선거에는 육지출신인 30대의 청년여성이 도지사 후보로 나섰다. '육지것'에 배타적인 섬나라 선거판에선 용기있는 도전이다. 선거 때마다 궨당과 학연이 판을 치는 특별한 제주자치도라 그녀의 출마는 신선하다.

이번 선거에서 정치 고단수나 머리 좋은 천재를 뽑는 게 먼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정 제주를 가슴으로 사랑하고 제주의 앞날을 위해 헌신할 인물을 선택하는 일이 우선이다. 조정철 목사만큼이나 선구적이고 인문의 품격까지 갖춘 인물이 뽑힌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그나저나 선거판의 설전이 날카롭고 어지럽다. 선거 후가 걱정이다.

<김양훈 프리랜서 작가>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1051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