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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신의 하루를 시작하며] 어느 기도
김현석 기자 ik012@ihalla.com
입력 : 2018. 05.1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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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형, 우연은 그렇게 운명이 되더라고요.

1974년 겨울, 하효농협 근무 당시, 월말 보고서 작성으로 경황없었을 때, "안삽니다, 지금 때가 언젠데 탱자씨를 삽니까, 탁 바쁜디 나갑서!" 영농부장의 단호한 목소리다. "선생님, 여비라도 마련하려고 합니다. 헐케 드리겠습니다, 선생님" 백발의 허리 굽은 할아버지가 연신 굽신거린다.

"감귤육묘는 벌써 끝나수다. 싱글 사람은 다 싱거베서마씀. 우리 농협에 탱자씨 살 사람 아무도 어시난, 어중거리지마랑 나가줍서" 떠밀듯 그 할아버지를 내보낸다. 그 할아버지 비틀 걸음으로 나가, 농협마당 정미소의 볕바른 구석에 풀썩 주저앉는다. 감귤주산지 농협이라 기대를 걸고 왔으리라…. 먼 길을 물어물어 어렵게 찾아왔으리라….

보고서를 덮고, 밖으로 나갔다.

"할아버지, 탱자씨 얼마나 됩니까?" "두 가마니 갖고 왔습니다." "그거 제가 사겠습니다." "선생님…" 통장엔 4만원 밖에 없었다. 기획 총무 성삼이 형에게 "6만원 주어십서" "미시거 헐거니?" "그냥 주어십서게" 10만원을 채워 그 할아버지께 드렸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꼭 사업 성공하십시오, 제가 늘 기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당시 봉급이 10만원이었다.

야근 끝내고, 인력거에 그 두 가마니를 싣고 오르막길을 끌어 집에 갔다. 기옥의 형네 집 신혼 셋방이었다. 아내는 무슨 쌀가마니인가 반색 했지만, 이내 표정이 굳어진다. "이걸 어떵 허젠 사옵데강?" 거듭 물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대책이 없었다. 땅 한 평 없던 시절이었다. 몇날 며칠을 그냥 보내다, 친구 유흡이를 만난다. 그는 땅이 많았다. "탱자씨 뿌령 반반 갈르게"했더니 "야, 지금 아무도 육묘사업을 안허는디, 이 많은 탱자씰 뿌령 어떵 헐 거니? 무슨 대책이 있어야 헐 거 아니냐?" 결국 그 친구 땅에 씨를 뿌렸던 것이다. 잘 가꿨으나 탱자묘목 살 사람은 아예 없었다. 비석거리에 큰 땅을 임대해 그 묘목을 다 옮겨 심었다. 열심히 키워 이듬해 접목을 붙인 것이다. 어렵게 1년생 귤묘목을 생산해냈으나, 매기는 전혀 없었다.

막대한 인건비 등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이제라도 파헤쳐 불태워버리는 게 사는 길"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예추가름 일대의 땅을 되는대로 다 임대해, 그 묘목들을 60㎝ 간격으로 전부 이식 했다. 장기전에 들어 선 것이다. 정성을 다해 2년생이 되어도 매기가 없기는 마찮가지였다.

주위의 걱정하는 말들은 더 많아졌으나, 개의치 않고 그냥 묘목 키우는 데만 힘을 썼다. 그렇게 3년생이 되던 가을, 하루는 중년 둘이서 묘목을 보러왔는데 "참 좋다"며 계약을 하고 갔다. 그걸 시작으로 이듬해 3~4월까지 신청자가 구름같이 몰려들어, 묘목 전량이 다 팔려나간 것이다. 실로 기적이었다. 어쩌면, 그 할아버지의 기도였을까?

기어이, 표선면 표선리 한곳에 22필지 4만여 평의 땅을 매입한 것이다. 청운의 꿈을 안고, 직장은 79년 1월 1일 성산포농협 신산 분소장을 끝으로 그만두었다. 나이 30이었다.

이후, 목장을 병행하는 등 한껏 욕심도 부리며 우여곡절을 겪는다. 얻고 잃고 또 얻기를 거듭한 섯다판 같은 부침의 세월, 결코 만만치 않은 그 여정에, 아직도 나는 감귤육묘를 한다, 시 쓰듯, 혼신으로. 참으로 0형, 그 우연이 이토록 운명일 줄은 차마 몰랐어요. 무시로 그 할아버지 모습이 보입니다. 그 기도가 들리곤 하는 것입니다.

<강문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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