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맥그린치 신부 선종…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사제

제주 맥그린치 신부 선종…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사제
전쟁 이후 지독히 궁핍했던 제주에 부임 성이시돌 공동체 일궈
"나는 아무것도 아니… 이웃 제 몸 같이 사랑하란 말 실천했을 뿐"
  • 입력 : 2018. 04.23(월) 22:00
  • 진선희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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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양영철 제주대 교수가 쓴 평전 '제주 한림 이시돌 맥그린치 신부' 발간 기념식장을 찾은 맥그린치 신부. 사진=제주도 제공

그는 제주섬에서 가난보다 더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사제였다. 23일 선종한 제주성이시돌센터 설립자 맥그린치(한국이름 임피제) 신부다.

아일랜드 태생인 맥그린치 신부는 성골롬반 외방 선교회 사제로 낯선 땅 아시아, 그중에서도 6·25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한국에 발을 딛는다. 1918년 아일랜드에서 설립된 성골롬반 외방 선교회는 가톨릭 사제가 부족한 나라, 특히 중국 등 아시아를 중심으로 신부를 파견해왔다.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은 맥그린치 신부는 신학교를 졸업하던 이듬해에 신학교 동창생 5명과 함께 한국 파견이 결정된다. 1953년 부산 도착 이후 전남 순천으로 옮겨 순천성당 보좌 신부를 지낸 그는 1954년 중앙성당 한림공소에 부임한다.

한림공소로 발령났지만 전기도 보급되지 않고, 포장된 도로도 없던 시절이었다. 초가에 머물며 사제로서의 임무를 수행해갔다. 맥그린치 신부는 한경면 저지와 청수, 한림읍 금악 등 멀리 떨어진 마을을 돌며 미사를 드리고 신자들의 가정을 돌봤다. 1957년엔 한림본당 금악공소를 설립해 제주 최초의 합동 신심 행사 등을 열었다.

가톨릭 신자수가 늘어가는 중에도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은 제주 사람들의 지독히 궁핍한 삶이었다. 가정마다 빚을 달고 살았다. 은행 대출이 어려운 탓에 돈이 급할 때엔 월 5부를 주고 개인에게 돈을 빌려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중에 돈을 갚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다. 신자중에도 그런 일이 생겼다.

이런 현실에서 그는 두가지 계명을 떠올렸다. '하느님을 사랑하라'와 '이웃을 사랑하라'였다. 거룩한 생활은 형식도 아니고, 이론도 아니고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말이 있다. 맥그린치 신부는 말로만 신앙을 전할 게 아니라 행동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남아일랜드 출신 신부에게 제주의 농촌 풍경은 고향과 너무나 흡사했다. 수의사 아버지를 둔 맥그린치 신부는 고향에서 보고 들었던 것을 바탕으로 신자 가정을 방문해 새로운 축산 농법을 권유한다.

4H 클럽의 탄생은 이 무렵에 이루어졌다. 4H는 머리(Head), 가슴(Heart), 손(Hand), 건강(Health)의 머릿글자를 딴 이름이다. 농촌 젊은이들의 자립을 돕는 단체로 한림성당에 나오는 학생들을 설득해 4H클럽을 조직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젊은이들과 아이디어를 주고 받으며 축산업을 현대화하고 우리 힘으로 가난을 몰아내자는데 뜻을 모았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양 서른 다섯마리를 키웠다. 맥그린치 신부는 아일랜드에서 어머니가 양털에서 실을 뽑아 옷을 짜던 기억을 떠올리며 제주에서도 양을 키워보자고 결심한다. 서른 다섯마리 양은 한림수직의 씨앗이 됐다. 한림읍 대림리에 있던 직조강습소가 한림수직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이를 통해 한때 1300명의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성골롬반 외방 선교 수녀회의 지도로 37년동안 한림수직이 가동됐다.

신부는 지역 청년들과 가축 은행도 설립했다. 양돈업을 하던 초반에는 그 사이에 건물을 지은 한림성당 마당에서 돼지를 길렀다. 하지만 냄새 때문에 미사를 보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신자들의 불평이 나왔다. 맥그린치 신부는 1주일에 한번씩 산책하던 금악리 정물을 떠올렸다. 맥그린치 신부는 우물이 있던 그곳에 3000평 부지를 사들인다.

농부들의 수호 성인 이름을 딴 성이시돌 공동체가 들어선 지역은 당시만 해도 굉장히 거친 땅이었다. 금악리 입구에 차를 세워놓고 목장 부지까지 걸어다녔다. 간신히 나있던 농로를 기준 삼아 차츰차츰 길을 냈다. 장마때마다 흙이 떠내려가는 바람에 비가 그치면 다시 길 닦는 일을 반복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며 외면했던 황무지에 묵묵히 씨앗을 뿌렸다. 이 일대엔 목장, 요양원, 의원, 경로당, 노인대학, 어린이집, 젊음의 집 등이 생겨났다.

맥그린치 신부는 제주 중산간에 축산업을 일으키고, 젊은 사람들이 자립할 수 있는 개척단지를 만들었으며, 신용협동조합과 한림수직을 만들어 일자리를 만들어준 공로로 1966년 5·16민족상을 수상했다. 1975년에는 외국인으로 아시아에 거주하며 사회봉사에 헌신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막사이사이상(국제 이해 부문)을 받았다. 농림부 장관상(1966), 대한민국석탑산업훈장(1972), 성이시돌 의원 대통령 표창(1977), 내무부 장관상(1982), 적십자 봉사상 금상(1990), 제4회 일가상 사회공익 부문(1994), 제주도문화상 1차 산업 부문(2002) 수상도 잇따랐다.

맥그린치 신부는 마지막 기도처럼 '제주다움을 잃지 말라'고 당부했다. 제주의 자연을 파괴하는 개발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지금보다 몇 박자 느린 '슬로우 관광'을 강조했다. 한림읍에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 있는 말기 암환자, 요양이 필요한 무의탁 환자들을 위한 무료 의원인 '성이시돌복지의원'을 세운 맥그린치 신부는 이곳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따스한 관심도 부탁했다.

사제 서품을 받은지 6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인 '회경축'을 앞둔 때에 맥그린치 신부를 만난 일이 있다. 당시 맥그린치 신부는 기자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했다. '이웃을 제 몸 같이 사랑하라'는 주어진 의무를 실천했을 뿐이라는 말이었다. "어머니들은 나보다 더 많은 희생을 하지 않았습니까. 사랑은 행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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