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한라일보 신춘문예] 소설당선작…이정연의 '사십사 계단'

[2018 한라일보 신춘문예] 소설당선작…이정연의 '사십사 계단'
  • 입력 : 2018. 01.02(화) 2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중앙시장 끝자락에 있는 사십사 계단을 오른다
'사'자가 두개나 있어 재수없는 곳이라 말하지만
'사사파'들에겐 이 지상에 유일한 자유로운 공간

성호가 사십사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하다. 성호는 노란 머리칼을 흔들며 한꺼번에 두 계단씩 뛰어 올라갔다. 성호가 계단에서 멈췄다. 성호가 뒤따라 오르는 내 쪽으로 돌아섰다. 나를 두 팔로 안았다. 노란 머리칼이 내 얼굴을 덮으며 흩어졌다. 담배냄새가 남아있는 입술이 내 입술 위에 포개졌다. 나는 성호의 냄새를 마음껏 탐했다.

"열 계단마다, 한 번씩 뽀뽀를 하자."

성호가 말했다.

"누가 먼저 할 건지 가위보로 정해."

"그걸 꼭 정해야 돼?"

"당근."

내 말에 성호가 침을 찍 뱉었다. 성호가 내뱉은 침에 거품이 섞여 나왔다. 성호의 입 주위에는 흰 거품이 조금 묻어 있다. 빡세게 당도를 투입할 때는 껌이 최고라는 성호는 지금 자일리톨 껌을 두 개나 씹고 있다.

"가위, 바위, 보."

나는 가위고 성호는 보를 냈다. 나는 성호의 귓바퀴를 살짝 물었다.

"야, 입에다 해."

"나는 네 귓불이 제일 섹시한데."

"씨바, 씨바."

성호의 입 안에서 괴어 있던 당분 섞인 침이 튀어나왔다. 성호가 손으로 입가를 쓱 닦더니, 내 젖가슴 위에다 문질렀다. 내가 몸을 앞으로 내밀어 젖가슴을 더 둥글게 만들었다. 성호가 내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키득 웃었다. 두 번째 가위바위보에서는 성호가 이겼고, 내 입에 살짝 키스를 했다. 세 번째에서는 내가 이겼고 나는 다시 성호의 귓불을 잘근 물었다. 성호가 '어어, 했다. 네 번째는 비겼다. 갑자기 성호의 혀가 내 입 안으로 쑥 들어왔다. 내 혀와 성호의 혀가 입안에서 엉켰다. 자일리톨 당분 속에 두 개의 혀가 미끈거리며 서로를 감았다.

어느새 공터였다. 공터에는 깨진 술병 조각이 굴러 다녔다. 빈 술병이 여기저기 나뒹굴었고 흩어진 담배꽁초가 발밑에 밟혔다. 발이 미끄러졌다. 납작하게 말라죽은 쥐의 시체가 발밑에 있었다. 발로 걷어찼다. 계단 위에는 익숙한 냄새가 떠돌아다녔다. 유령처럼.

그림=김지영

중앙시장 안에서 깨를 볶는 고소한 냄새, 어묵을 기름에 튀기는 냄새, 닭 강정 만드는 냄새, 한약 달이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실려 왔다. 내일은 '전통시장의 날'이어서 상인들이 관광객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요즘 시장 안에서 파는 닭강정과 호떡은 관광객들이 줄을 서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인기 상품이다. 나도 언젠가 성호가 사 온 닭강정과 호떡을 먹어 보았는데 닭강정의 감칠맛과 호떡맛은 내가 맛본 음식 중 갑이었다.

사람들은 중앙시장 끝자락에 있는 사십사 계단을 '사' 자가 두 개나 들어가 있는 '재수없는 곳'이라고 하지만 '사사파'들에게는 이 지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자유로운 공간이다. 사십사 계단 꼭대기 공터에도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아직도 허물어진 폐가 하나가 만지면 풀썩 내려앉을 듯한 몸짓으로 간신히 서 있다. 봄이면 썩어 내려앉은 지붕 사이에서 민들레가 노란 얼굴을 내밀었다. 풀숲에서 까망이가 뛰쳐나왔다. 까망이는 내가 사십사 계단에서 만난 까만 들고양이다. 나는 까망이를 안아주었다. 까망이가 내 손을 핥더니 식빵 굽는 자세로 엎드렸다.

성호가 그나마 깨끗한 곳을 찾아 풀 속에 드러누웠다. 나도 성호 옆에 나란히 누웠다. 성호가 내 목을 휘감아 안고 몸 위로 올라왔다. 성호는 부드러운 내 몸속으로 자신의 뻣뻣한 물건을 성급하게 밀어 넣었다. 우리는 오래된 연인들처럼 서로의 몸을 탐했다. 따뜻한 액체가 아랫도리를 흥건하게 적셨다. 내 몸의 실핏줄이 부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냥 너를 안고 있으면 사는 게 무섭지 않아.' 성호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노란 머리칼이 내 이마를 덮었다. 혀를 내밀어 성호의 이마에 돋은 땀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짭짤했다.

"좋아?"

성호가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성호의 귓불을 입으로 핥아주었다.

"돈 벌면 뭐 하고 싶어?"

성호가 물었다.

"내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만도 신나. 어디든 너랑 함께 떠나고 싶어. "

성호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번에는 내가 성호에게 물었다.

"너는 왜 돈 버는데?"

"돈이면 만사형통이니까. 엄마 집으로 기어들어가는 상상은 생각만도 비참해."

"마루 밑에 들어가 덜덜 떠는 기분보다 덜 비참할 걸."

내가 말했다. 누구는 '인간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을 개뿔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인간은 초등학교 때 술에 절어 세상을 버린 아빠다. 아빠는 알코올의 힘을 빌려 네 살밖에 안 된 나를 집 마당으로 내동댕이쳐 앞니를 다 부스러뜨렸다. 벤치든 망치든 집에 있는 연장은 가리지 않고 휘둘렀고 심지어는 야구방망이로 나를 후려치기도 했다. 서쪽 하늘에 저녁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면 내 심장은 빠른 박동으로 온 몸을 두드리며 지옥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엄마와 나는 아빠를 피해 마루밑에 기어들어가 새벽이 올 때까지 덜덜 떨었다. 나는 버림받은 개였다. '사사파'에는 그런 애들이 수두룩했다.

'사사파'들은 - 사람들은 우리를 그렇게 불렀다 - 계단 끝 공터에 이르러서야 섹스를 하고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지난번 십층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은 여중생도 '사사파'였다. 그 아이도 임신 중이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야, 성호"

어둠 속에서 영철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르스름한 가로등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영철이의 모습을 비췄다. 영철이가 원숭이처럼 어기적거리며 계단 끝을 넘어 공터로 들어왔다. 영철이는 아저씨들처럼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이들은 영철이의 아랫도리에 덜렁거리는 물건을 핫도그라고 불렀다. 얼핏 보기에도 영철이의 심볼은 영화관에서 먹는 뉴욕 핫도그만 했다. 핫도그를 발음하다가 핫의 모음을 '어'로 길게 끌며 소리 내는 바람에 아이들은 그날로 '도' 음절을 빼고 허그라고 불렀다. 아이들은 영철이를 보면 '허그 허그' 하고 불렀지만 영철이는 짜증스러워하는 낯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재미있어 했다.

"야, 허그, 이리 와."

성호가 소리 질렀다. 영철이는 우리가 진짜 반갑다는 듯이 풀썩 앞에 와 앉았다. 영철이는 성호가 없을 때 공터에 서 있는 내 등을 슬그머니 껴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영철이의 정강이를 걷어차곤 했다. 그러면 영철이는 멋쩍게 웃으며 물러났다. 영철이는 여자애들에게 치근덕거리기는 하지만 해코지를 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여자애들은 영철이를 꺼리지 않았다. 영철이가 헐떡이는 숨을 가라앉혔다. 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불을 붙였다.

"사십사 계단도 이제 폐쇄된다는데 모피나 왕창 훔쳐서 한몫 크게 잡는 게 어때?"

영철이가 한 손에 담배를 들고 우리를 향해 말했다.

"어떤 놈이 여기를 폐쇄한대?"

성호가 눈앞에 있는 적들을 후려칠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방법 없잖아, 경찰이 두드려 패서 내쫓는다는데."

영철이가 패배자의 목소리로 말했다. 시장 번영회에서 사십사 계단을 폐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건의했다는 소문이 있다. 관광객을 유치하는데도 인상이 좋지 않고 우범지역이 옆에 있으면 장사가 될 리 없다는게 시장상인들의 주장이라고 했다. 일이 더럽게 되었다. 우씨. 퍽하면 우리를 걸고 넘어지는 치들 때문에 한시도 편할 날이 없다. '사사파'들의 숨통을 죄는 것들에게 악마의 저주가 강림하기를.

"새꺄, 기회가 문제지. 한 번 힘껏 달려 한몫 챙겨서 토껴버릴까?"

성호가 엄지와 검지를 딱 소리나게 맞부딪치며 과장되게 말했다. 사실, 모피를 훔쳐 팔아먹자는 제안을 처음 한 것은 영철이었다. 아니다. 영철이는 마음은 있었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우리에게 불을 지핀 것뿐이었다. 게다가 옷 수선가게 아저씨의 응원도 한몫했지만. 하여튼 영철이의 제안 덕분에 모피를 훔칠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래도 성호는 영철이에게는 우리가 모피 훔칠 계획이 있다는 말을 당분간 하지 말라고 했다. '짜샤, 치사하게 숨길게 뭐냐.' 나는 웅얼거렸다.

성호가 '넌 어때' 하는 식으로 나를 보고 눈짓을 했다. 진짜 내 마음은 보관실에 있는 모피를 몽땅 훔쳐 팔아 돈을 들고 스페인의 말라가 해안으로 날아버리고 싶었다. 비치체어에 길게 누워 바다를 바라보다가 수영을 하고 바케트에 치즈를 끼워 우물거리면서 해질녘까지 빈둥거리고 싶었다.

"굿굿굿 아이디어, 손에 코 안 묻히고 코 풀면 더 좋지만."

내 말에 영철이가 박수를 치며 킬킬거렸고 성호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모피 비너스>에는 여러 매장에서 팔다 남은 모피들이 화물로 가죽부대에 담겨져 오기 때문에 분류작업과 입고 정리는 꽤 시간이 걸렸다. 성호와 나는 그 기회를 잘 이용하기로 했다. 게다가 한창 세일이 진행 중인 지금 같은 때는 다시 안 올 좋은 기회였다. 옷 수선가게 아저씨는 들키지만 않게 조심하라며 얼마든지 모피를 가져오라고 했다. 아저씨는 목소리를 낮춰 말하며 전략적으로 한탕하면 목돈 좀 만질수 있을 거라고 우리를 부추겼다. 그럴 때마다 성호와 나는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했다. 성호와 나, 둘 다 돈이 필요했다. 학교를 때려 치고 <모피 비너스>에서 모피를 나르는 성호는 집을 나와 고시원에 살고 있고 나는 <모피 비너스>에서 살고 있지만 언제 일터에서 잘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 옆에 웅크리고 있던 까망이가 박수소리에 놀라 야옹거리며 달아나려 하자, 영철이가 꼬리를 꽉 잡았다 놓아주었다. 까망이가 잡풀 속으로 달아났다. 나는 까망이를 위해 먹이를 챙기고 시간이 날 때마다 안아주었다. 까망이를 팔에 안고 털을 쓰다듬어 주면 까망이는 가르릉거리며 눈을 감았다. 가르릉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포근한 보금자리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내가 '야옹야옹' 하고 소리를 내자, 잡풀 속에서 까망이가 뛰쳐나왔다. 나는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온 구운 생선뼈를 꺼내 놓았다. 까망이는 <모피 비너스> 옆의 <고갈비 식당>에서 얻어 온 생선뼈를 내 다리 사이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아 오도독 씹어 삼켰다. 까망이 등의 털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생선뼈를 다 삼킨 까망이가 내 손을 핥았다. 간지러웠다. 키득키득 웃음이 나고 아랫도리가 저릿저릿했다. 까망이는 혀를 낼름 내밀었다 들이밀고는 섹시한 걸음으로 걸어다녔다. 요즘 까망이는 배가 불룩했다. 애기를 가진 모양이었다. 손으로 까망이의 긴 등뼈를 쓸어 주었다. 내 손길에 까망이가 등뼈를 쑥 위로 올렸다. 고혹적인 등뼈였다. 까망이를 보고 있으면 보드라운 아기의 볼이 그리워졌다.

<마리의 집>은 '싱글 맘'들의 쉼터였다. 사람들은 '미혼모의 집'이라고 불렀다. '싱글 맘'이라고 불러주면 좋을 것을 굳이 '미혼모'라고 부르는 건 뭐냐, 싶었다. 하지만 나 같은 인생들을 아기 낳을 때까지 품어 주었던 그곳을 이름 때문에 시비 걸 생각은 없다.

나는 임신 일곱 달째 집을 나왔다. 왜 대책 없이 그 지경까지 버텼냐고 하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경식이 오빠가 간신히 돈을 구해 왔을 때는 병원에서도 이미 칠 개월이 넘어 손을 쓸 수 없다고 했다. 경식이 오빠는 내 몸에 들어와 즐길 때는 눈치 볼 거 없이 화끈하더니, 오빠의 정액과 내 난자가 만들어낸 소중하지만 위험한 선물을 모르쇠 했다. 내 닦달에 돈을 구한다고 경식이 오빠가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 시간이 흘렀다. 나는 복대를 둘러 나오는 배를 누르고 집을 나올 궁리만 했다. 새벽마다 일을 나가는 엄마는 딸 뱃속에서 커가고 있는 생명체의 존재를 알 길이 없었다.

<마리의 집>에서의 일과는 청소, 기도, 요가, 성경읽기, 외부 강사의 교양 강의 듣기, 자유시간으로 비교적 단순했다. 외부 강사들은 은근히 우리를 개과천선해야 될 대상으로 생각했다. 나는 사는 일이 댁들처럼 편안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라고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다. 방 한 칸에서 엄마와 있는 것도 싫고, 엄마가 돈이 없어 쩔쩔매는 꼴도 싫고, 학교에서 폐휴지처럼 구겨져 있는 것도 싫고, 모두 싫은 것 투성이인데 날 좋아하는 경식이 오빠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 이 세상 무엇보다 좋았다고 말이다. 경식이 오빠가 애기 낳고 결혼해서 살자고 했으면 난 그렇게 살았을 거다. 학교를 다 때려치우고라도 말이다. 우리애기랑, 경식이 오빠랑 나랑 살았으면 내 인생은 샛별처럼 빛났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엄마가 경식이 오빠 부모를 찾아갔을 때 오히려 엄마는 호되게 당하고 왔다. 계집애가 어떻게 몸을 굴렸길래 그 모양이냐는 둥, 다시는 우리 아들 만날 생각도 하지 말라면서 아기는 입양을 보내든지 맘대로 하라고 했단다. 엄마는 눈이 퉁퉁 부었다. 난 그 뒤로 경식이 오빠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경식이 오빠의 아빠는 소문이 퍼질까봐 엄마에게 돈을 쥐어주며 빨리 나를 시설로 보내라고 했다. 그 후로 엄마는 사람 목소리만 들으면 깜짝깜짝 놀랬다. 이후, 나는 사랑 따윈 믿지 않기로 했다. 이 사막 같은 지상에서는 안전한 사랑도, 완전한 사랑도 꽃을 피우기는 영 글러 먹었다. 제기랄. 치사하고 더럽다.

<마리의 집>에서는 같은 처지의 아이들 대여섯 명이 함께 방을 썼다. 내가 태어날 애기를 걱정할 때마다 <마리의 집>에 있는 다른 아이는

"까짓 거 베이비 박스에 던지면 그만이지."

베이비 박스를 쓰레기 박스 말하듯 시니컬하게 내뱉었다. 비상구 없이 꽉 막힌 상황이 우리를 자조적으로 만들었다. 물론 입양조건으로 돈을 내거는 아동복지 재단들도 있었다. 나는 아동 복지재단에 전화를 걸어 상담을 했다. 상담소마다 제시하는 조건은 달랐다. 'A상담소가 오십이라면 저희는 오십 더 써서 백으로 할게요.' 이 인간들은 내 뱃속의 아기를 놓고 경매를 붙였다. 재수 똥이다. 돈이면 다 되는 이런 세상은 망해버리는 게 낫다. 어쨌든 나는 아기를 무사히 낳았고 <마리의 집>을 빠져나왔다. 지금으로선 아기를 찾을 계획은 없다. 가능하지도 않다.

<마리의 집>을 나오자, 내 마음은 아기가 빠져나간 자궁처럼 허전했다. 갈 곳이 없었다. 나는 지방도시인 이곳, L시로 무작정 버스를 타고 왔다. 알림방 신문에서 일자리를 찾으며 전화를 해댔지만 선뜻 나를 써 주겠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조급한 마음으로 구인광고를 찾다가 '급구함, 청소, 매장정리, 여자 원함, <모피 비너스>.' 라는 광고가 눈에 들어 왔다.

도심 상가에 있는 <모피 비너스>는 쇼윈도우 전면에 '여름대박세일'이라는 대형광고를 내걸고 있었다. 매장 안으로 들어가 일자리를 구한다고 하자, 당장 세일시즌이 닥치고 맞춤한 일손을 구하지 못한 사장은 나를 보고 좋아라했다.

<모피 비너스> 사장은 다른 모피 숍에서 팔다 남은 상품들을 다 거두어 여름 한철에 대박세일을 했다. 아울렛 매장이 없는 이 도시에서는 사장의 역시즌 공략이 먹혀들었다. 이리저리 메이커 숍을 돌던, 디자인이나 색상이 뒤떨어지는 모피는 여기에 다 모여 들었다. J모피나 T모피 같은 대기업 제품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중소기업 제품까지 흘러들어 왔다.

사장은 간단한 면접만으로 나를 쓰겠다면서 매장 뒤에 붙은 방으로 안내했다. 내가 머물 곳은 모피 보관실 옆에 붙어 있는 두 평 남짓한 작은 방이었다. 해야 할 일이란 수선한 옷들을 비닐에 넣어 가지런히 걸어두거나, 분류해서 옷 수선가게에 맡기는 것, 손님이 오면 실장의 지시에 따라 손님의 몸에 옷을 피팅하는 것이었다. 매장 청소는 기본이었다. 나는 컴퓨터에 입고 물품을 입력해 넣거나 청소, 커피 심부름, 판매, 어떤 일이든 가리지 않고 했다. 시급은 육천 원을 밑돌았지만 잠잘 방이 있다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여름에 반값 세일로 이월 상품을 처리해야 하는 매장은 허드렛일이 많았다. 낮에도 줄줄이 켜 놓은 조명을 견뎌야 하는 내 눈알은 밤이 되면 쓰라렸다.

영철이가 이대로 헤어지기 싫다며 순대국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영철이의 성화에 우리는 사십사 계단에서 내려와 중앙시장 순대국 골목으로 갔다. 이 골목에는 주로 할머니들이 오래 전부터 장사를 해왔다. 골목 입구에서부터 큰 가스불 위에 커다란 솥이 걸리고 돼지머리가 삶아지고 있거나 국이 설설 끓었다. 간판이 보였다. <할머니 순대국>, <장터 순대국>, <돼지 순대국>. 이름도 재미있었다. 삶은 돼지 머리에 눈이 갔다. 돼지 코가 징그럽고 재미있었다.

우리는 <할머니 순대국>으로 들어갔다. 특히 영철이는 <할머니 순대국>의 단골이었다. 성호와 내가 일이 끝난 시간에는 문을 여는 가게들이 없는데 이 순대국 골목에는 열 시 이후가 가장 달아오르는 시간이었다.

성호, 영철이와 함께 <할머니 순대국>으로 들어섰을 때는 손님들이 한창 술판을 벌이고 있는 시간이었다. 식당 안에는 흙이 여기저기 묻은, 싼 등산화 여러 켤레가 놓여 있었다. 막일을 하는 아저씨들의 신발이었다. 우리는 순대국 두 그릇과 모듬 순대 하나, 소주 두 병을 시켰다. 영철이는 주방에 가서 순대국도 받아오고 냉장고에서 술도 꺼내왔다.

막일 하는 아저씨들이 우르르 순대국집을 빠져 나갔다. 우리만 남아 소주를 세 병이나 더 마셨다. 순대국집 할머니는 뜨거운 김이 나는 국물을 국자에 담아 국물이 줄어든 그릇에 부어 주었다. 그리고는 지폐로 불룩한 앞치마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로 벽에 기대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영철이는 제 집처럼 냉장고를 열고 소주도 가져오고 열무김치도 덜어 왔다.

할머니가 잠을 깬 시간은 새벽이었고 우리는 꾸역꾸역 돼지 순대와 소주로 창자를 채웠다. 이윽고 졸다가 깬 할머니가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며 우리를 내몰았다.



영철이와 헤어진 뒤로 성호와 나의 관심사는 '모피 한 건'에 꽂혀 있었다. <모피 비너스> 여사장과 실장언니가 도끼눈을 뜨고 매장을 감시하기 때문에 틈새를 파고들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모피가 대량으로 들어오는 세일기간에는 어쩔 수 없이 감시가 느슨해지기도 했다. 나태하던 우리의 욕망에 불을 지른 것은 역시 영철이었다.

야호! 목돈이 생겼다. 모피를 훔쳐 파는 데 성공했다. 성호와 내가 이런 대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각별한 주의와 노력이 필요했다.

사장과 실장이 전국 모피의류 판매협회 모임으로 자리를 비운 날이었다. 사장과 실장은 세일 판매 우수업체로 상을 받게 됐다면서 들떠 있었다. 덕분에 우리에게 기회가 온 셈이다.

타당, 끽. 급정거하는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나는 쇼윈도우 밖을 내다보았다. 방금 마네킹 발치에 놓인 실크 스카프를 가지런히 접어놓는 중이었다. 성호가 쇼윈도우 안의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마네킹 왼쪽 어깨로 흘러내린 모피를 치켜 올리며 손을 흔들었다. 성호가 검은 레이싱 글러브를 낀 손으로 오토바이 핸들을 비틀었다. 머리가 노랬다. 성호의 시선이 팬티와 브라만을 걸치고 붉은 여우 모피를 입은 여자 브로마이드에 걸렸다. 성호가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며 검은 레이싱 글러브를 낀 두 손을 마주쳐 탁탁 소리를 냈다. 성호가 수선한 모피를 싣고 와 보관실의 행거에 걸었다. 나는 성호를 따라 들어갔다. 보관실 안은 어둡고 찐득하게 더웠다. 죽은 짐승의 털가죽 냄새가 열기를 타고 훅, 코 속을 후볐다. 보관실에 들어설 때마다 섬뜩할 때가 있다. 털가죽이 벗겨진 밍크, 붉은여우, 양, 수달, 족제비, 너구리, 담비, 비버, 토끼, 물개가 목을 죄는 인간의 손에서 마지막 탈출을 하는 가당치 않는 상상이 블링블링했던 내 기분을 블루블루하게 끌어내렸다.

'사사파' 아이들은 모두 경찰의 의심을 받았다
경찰은 영철이가 범인이라고 단정짓는 모양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사람이 다르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내 내면에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이 들끓었다

성호가 뒤따라 들어왔다. 성호는 손바닥으로 천천히 벽에 걸린 모피를 차례로 쓸어내렸다.

"이건 라쿤 털, 이건 어린 양의 껍질, 이건 앙고라, 라이터로 확 붙이면 잘 타겠다."

성호가 장난스럽게 모피에 라이터를 들이댔다. 팔꿈치로 성호를 세게 밀쳤다. 어, 비틀거리며 성호가 밀려났다. 모피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건 스칸디나비아산 붉은 여우털이야. 털이 길고 부드러워서 여자들이 혹 반하는 물건이야."

성호가 으스대듯이 말했다. 성호가 모피를 집어 올려 행거에 걸었다. 붉은 여우모피는 탐스럽고 매혹적이었다. 아름다운 모피를 얻기 위해 동물들을 산 채로 껍질을 벗긴다고 사장은 말했다.

성호가 내 몸을 벽쪽으로 밀어붙였다. 성호의 노란 머리칼이 부드러운 양모처럼 흔들렸다. 바지를 뚫고 튀어 나올 듯한 두 다리 사이의 돌출이 느껴졌다. 성호의 입김이 가죽 냄새와 뒤섞여 얼굴로 몰려들었다. 노란 머리카락이 얼굴을 핥으며 지나갔다. 성호의 몸이 나를 압박해 왔다. 나는 성호를 안았다. 보관실 벽을 따라 걸려 있는 밍크 털에 성호의 뒤통수가 파묻혔다. 죽은 짐승의 털과 사람의 털이 뒤섞였다.

보관실을 먼저 나와 매장에 서 있는 내게 성호가 흰 모피를 들고 나와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모피는 아랫단이 플레어로 퍼지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어깨에 모피를 걸치고 거울 앞에서 오른쪽 다리를 꺾어 폼을 잡았다. 불빛이 털 사이로 스며들었다. 구슬이 박힌 듯 모피의 털이 반짝였다.

"어때?"

"어얼, 멋있는데."

나는 아프리카 섹시 댄스를 추듯이 엉덩이를 흔들었다. 엉덩이로 성호의 불룩한 바지 앞을 톡톡 치며 자극했다.

"이걸로 해."

성호가 말했다. 뭘, 하는 표정으로 성호를 쳐다보다 나는 확, 깨달았다. 오늘은 한 건하는 날이라는 것을. 파박, 감이 왔다. 나는 작은 가위 끝으로 세심하게 흰 모피의 상표를 잘라내었다. 그리고는 성호가 가져온 입고 물품표에서 흰 모피를 빼고 번호부분을 흰색 수정테이프로 문질러 지운 다음 번호를 다시 쓰고 복사를 했다. 컴퓨터를 켜고 흰 모피 입고 번호를 슬쩍 빼고 입력하지 않았다. 대신 컴퓨터 화면에 뜨는 입고번호의 순서는 잘 맞춰 놓았다. 이만하면 훌륭했다. 마지막 세일 때문에 미쳐 돌아가는 와중에 흐름을 타고 어물쩍 넘어가야 한다. 나는 성호와 하이 파이브를 했다. 성호가 가죽부대를 가져와 흰 모피를 담았다. 성호는 비밀스럽게 모피를 옷 수선가게 주인에게 덤핑으로 넘겼다. 옷 수선가게 주인은 하룻밤이면 완전히 다른 물건을 만들어 팔 수 있는 재주가 있다고 큰소리쳤다고 했다.

그림=김지영

돈이 생겼고 한 달에 한 번 있는 휴일이었다. 성호와 손을 잡고 맥도널드가 문을 열자마자 뛰어갔다. 코카콜라와 더블버거를 사서 입이 째지도록 밀어 넣었다. 프라이드포테이토에 토마토케첩을 듬뿍 뿌려 손가락에 묻은 케첩을 핥아가며 먹어댔다.

배를 채운 다음에는 호숫가에 있는 <포에버 랜드>로 바이킹을 타러 갔다. 성호와 나는 소리를 지르면서 바이킹을 즐겼다. 해적처럼 과감하게 서로의 입술을 훔치기도 하고 소리를 꽥꽥 질러대기도 했다. 바이킹이 하늘에 닿을 듯 치솟을 때마다 도시는 우리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호숫가의 물결이 발끝에 찰랑였다. 위험하고 아찔하고 짜릿한 기분이 혈액 속에서 팡팡 거품을 터뜨리는 듯했다. 바이킹이 높이 치솟을 때 멀리 <무비 몰>의 대형 간판이 우리를 유혹했다. 이런 유혹에 우리는 버티지 않고 복종하는 미덕을 지녔다.

<무비 몰>에서는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 뉴욕 핫도그를 하나씩 먹었다. 빅 사이즈 팝콘과 찬 맥주를 한 캔씩 들고 영화를 보았다. 영화 제목은 <사랑에 관한 이상한 상상>이라는 프랑스 영화였는데 어떤 장면에서는 지루하기도 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언제든지 성호의 손이 내 허벅지 안쪽을 자극하도록 나는 무릎 사이를 열어 두었다. 성호는 능력자다. 시시한 장면들에선 내가 심심하지 않게 팬티 안쪽에 손을 넣어 내 보드라운 살을 만져 주었다. 스포르찬도, 포르테시모, 포르테, 피아노의 세기로 스타카토를 두드렸다. 그럴 때 나는 찬 맥주를 홀짝거리며 성호의 발랄한 애무를 즐겼다.

영화를 보고 나서 로비에 앉아 성호의 등에 손을 넣었다가 도드라진 상처의 감촉 때문에 깜짝 놀랐다. 손을 성호의 등줄기 쪽으로 올리니 얻어맞은 상처가 손가락에 느껴졌다.

"아프겠다."

내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하자 성호가 말했다.

"괜찮아, 생각할수록 열 받네. 급습을 해서는 방어할 틈도 없이 후려친다니까, 이렇게 골프채로 얻어맞다가는 언제 골통이 부서질지 몰라. 우리 엄마가 공 하나는 잘 날리거든. 특히 벙커에 빠진 공을 잘 날리지, 나같이 벙커에 빠진 놈 말이야. 하긴 로프로 묶어 놓고 때리던 때보다야 낫긴 하지. 씨팔, 이런 얘기 기분 더러워."

보험세일즈를 하는 성호 엄마는 집을 나온 성호를 예고 없이 습격해서 후려친다고 했다. 비밀리에 방을 옮겨야겠다고 성호가 말했다. 성호 엄마는 성호가 다시 집으로 들어오기를 바라지만 성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다. 그래도 오라는 데가 있는 성호가 개털 같은 나보다 낫다.



세일기간이 며칠 남지 않자, 사장은 50프로에서 80프로 세일로 작전을 바꿨다. 아침부터 손님들이 밀려들었다. 손님들 몸에 옷을 피팅하다 보면 온 몸이 무너질 지경이었다. 더위에 무거운 짐승의 털을 들고 이 손님 저 손님 쫓아다니는 일은 버거웠다. 털을 빼앗긴 붉은 여우처럼 비참한 기분이었다. 천정 위에서 내리비치는 형광 조명은 눈알을 쓰라리게 했다. 파김치가 되도록 모피를 들고 다녔건만 사장은 하루 결산을 하면서 매출이 별로 안 된다고 투덜거렸다. 실장 언니가 나를 째려보았다. 내가 희생양이 되어야 하나 보다. 사장의 눈빛도 내게로 쏠렸다.

"야, 손님들이 옷을 걸치면 섹시하다는 말은 기본으로 나와야 하고 설원 병원장 사모께서는 이런 걸 두 벌씩이나 사셨다는 둥, 사고 싶은 맘이 들도록 부추겨야지, 멍충이처럼 뻣뻣하게 서서 멋있네요, 멋있네요만 연발하고 있어."

사장은 말벌처럼 나를 콕 쏘았다. 킬힐로 사장의 눈가를 콱 찍어주고 싶었다. 콱 찍어주는 김에 할 수만 있다면 아예 갑,갑,갑 하고 문신이라도 새겨주고 싶었다.

손님의 쇼핑 욕구를 오래 지속시키기 위해 손님이 들어오면 재빨리 원두커피나 냉녹차를 권했다. 손님이 모피를 둘러보는 사이 행거 사이로 슬쩍 들어가 입구 쪽으로 등을 돌리고 열심히 상품을 홍보했다. 돈 때문에 망설이는 손님들에겐 카드 할부를 적극 권했다. 다 아는 셈법인데도 내가 나서서 12개월 할부 가격을 얘기해 주면 손님들은 갑자기 얼굴이 밝아졌다. 탐은 나지만 가격 때문에 망설였던 손님들이 적극적으로 모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손님들은 거울 앞에서 입어보다 한숨을 쉬며 행거에 걸어 두었던 모피를 꺼내 다시 몸에 걸쳐 보았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정말 사모님 옷이네요, 핏이 죽여요. 실루엣도 좋고요."

손님들은 나의 달콤한 유혹에 지갑을 열고 카드를 내밀기도 했다. 카드를 긁고 모피를 큰 가방에 담아 매장 출입문까지 손님을 배웅했다.

"멋지게 입으시고요, 또 들르셔서 커피 한잔하세요."

<명품모피 80프로세일>이라는 형광색 문자가 잠자는 도시를 향해 세일세일세일이라고 눈을 부릅뜨고 외치고 있었다. 내일도 곧 세일이 끝날까 안달하는 여자들이 모피를 사기 위해 이 숍으로 몰려올 것이다. 손님들은 까다로웠다. 나는 그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행거 사이를 뛰어다니고 촉수 높은 형광등 아래 킬힐을 또각거리며 발등이 꺾이지 않을까 걱정해야 했다. 사장은 팔십 프로 세일에 재고품을 모두 팔아 볼 전략을 생각하느라 바빴다. 나는 고객명단을 꺼내 메시지를 날리고 매장에 놀러 오시라고 전화를 걸었다.

성호와 <모피 비너스>를 나오다 입구에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홈리스 아저씨를 발견했다. 아저씨의 머리는 기름이 흘러 떡이 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씻지 않은 손가락이 새카맣게 반들거렸다. 비오는 날, 아저씨 옆에 다가서면 지린내가 코를 찔렀다. 아저씨는 <모피 비너스>에서 내버린 종이박스를 정리해 고물상에 갖다 주고 번 돈을 술 마시는데 다 썼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불러 세워 손을 벌리거나 먹을 것을 구걸했다. 성호와 내려오는 나를 발견한 아저씨는, 늘 그렇듯이 '먹을 것 좀 사 줄 수 있어?' 하고 물었다. 아저씨의 말을 들은 성호는 건너편 편의점으로 가서 카스테라와 흰 우유를 사왔다. 성호가 아저씨의 시커먼 손에 카스테라와 우유를 들려주자 아저씨는 목울대를 울리며 우유를 마셨다. 부드러운 카스테라가 아저씨의 손에서 부서졌다. 카스테라를 입에 넣은 아저씨의 몸이 자벌레처럼 움츠러들었다.

"생각보다 따뜻하다 너."

"너나 나나 저렇게 되는 것 순간이야, 소문도 없이 죽지 않으면 다행이라니까, 존나 끔찍해."

성호의 말이 천만 번 옳다고 생각했다. 이미 집을 나온 나와 성호는 돈이 떨어지면 몸을 뉘일 곳도 없고 먹을거리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뉴욕의 지하터널에서 홈리스들이 그들만의 지하세계를 구축하고 산다는 신나는 얘기도 이 '헬조선'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젠장할. 불이라도 확, 질러버리고 싶다.



킬힐을 신은 채, 두 손에 모피를 들고 옷 수선가게를 들락거려야 하는 일은 죽을 맛이었다. 옷 수선가게 아저씨는 은근히 언제라도 좋으니 모피를 빼내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재봉틀을 돌리다 멈추고 제안을 하는 아저씨의 목소리는 내겐 일종의 협박처럼 들렸다. 너도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다 안다는 듯이.

"다음 건은 언제야?"

하는 아저씨의 입에서는 점심으로 먹은 짜장면과 양파냄새가 났다. 옷 수선가게 아저씨가 사장에게 입을 나불댈까봐 간이 졸아들었다. 그 생각만 하면 매장에 서 있다가도 종종 허든거리기 일쑤였다. 불안을 떨쳐 버리기 위해 마음 한편에서는 '성호와 크게 한탕 벌이고 스페인행 비행기를 타고 날라버리면 되는데.' 하고 막연한 꿈을 꾸기도 했다. 성호에게 세일기간이 끝나기 전에 빨리 한 건 크게 하자고 얘기를 안 한 것도 아니었다. 성호는 '기다려' 하고 대답은 해 놓고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모피는 부피만도 커서 물건을 숨기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성호의 도움 없이 나 혼자 모피를 훔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기동성이 있는 성호는 언제든지 모피를 숨겨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었다.

"대박세일 때 한탕해야 대박나지."

수선가게 아저씨가 돋보기 안경을 내려뜨리고 일을 하며 말했다. 나는 아저씨가 함눈 파는 틈을 타 옷 솔기를 뜯는데 사용하는 송곳 하나를 슬쩍해서 가방에 집어넣었다. 뾰족한 물건은 뭐라도 하나 있으면 든든하다. 은근슬쩍 나를 재촉하는 옷 수선가게 아저씨의 말을 뒤로 하고 수선한 모피를 찾아 양손에 들었다. 팔이 빠질 것처럼 아팠다. 성호가 물건을 찾아오긴 하지만 급히 옷을 찾는 손님 때문에 이런 심부름을 가끔 해야 했다. 한 번에 모피 두 벌을 들고 걷다보면 팔에 통증이 오곤 했다. 허리를 펴고 걸었다. 매장에서 뻣뻣하게 서 있던 다리를 바쁘게 놀리느라 붉은 색 보도블록 틈새로 킬힐 굽이 툭툭 빠졌다. 몸이 앞쪽으로 굽혀졌다. 내리막길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허리근육에 힘을 줬다. 앞으로 쏠릴 것 같은 자세 때문에 콧등에 땀이 솟았다.

<모피 비너스> 실장은 내가 시간을 지체할까봐 한눈팔지 말라고 눈치를 주곤 했다. 발뒤꿈치가 아팠다. 유리문을 밀치고 들어서니 서늘한 냉기가 소름이 돋도록 밀려들었다. 일찍 오네, 이 분들이 기다리고 계셔. 실장이 경찰 둘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를 기다리던 경찰 둘이 영철이의 행방을 물었다. 사장과 실장은 셋이 붙어 다니더니 '이제 어쩔 거냐'는 표정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영철이의 오토바이가 중앙시장 공용화장실 근처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순대국집 할머니가 집을 판 날 숨졌다고 했다. 순대국집 할머니는 벽에 기대어 목을 꺾고 칼에 맞아 죽어 있었다고 했다. 할머니의 현금다발도 사라졌다고 했다. '사사파' 아이들은 모두 경찰의 의심을 받았다. 경찰은 영철이가 범인이라고 단정짓는 모양이었다.

성호와 나도 경찰서에서 진술서를 써야 했다.

"이참에 아주 사십사 계단을 폐쇄해 버려야 돼."

경찰은 목소리를 높이며 진술서를 작성하는 우리 사이를 쑤시고 다녔다. 볼펜으로 내 무릎의 맨 살을 콕콕 찌르기도 하고 구두발로 성호의 발을 퉁퉁 찼다.

"쓰레기 같은 놈들이 모여서 오줌이나 내깔리고. 풍기문란하게 구는 꼴, 더는 못 봐. 돈 훔치려고 사람 목숨이나 노리고."

경찰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영철이가 사람을 찔러 죽일 인물은 못 된다고 생각했다. 돈이 필요하면 눈에 뵈는 게 없겠지만 그래도 영철이가 잔인한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건은 영철이와 같이 크게 한판 해서 돈을 나누자고 성호와 얘기한 적이 있었다.

"영철이, 그 새끼, 어디서 계집애를 오토바이 꽁무니에 달고 열나게 달리고 있는 거 아냐?"

영철이를 성가셔하던 성호였지만 지금은 영철이가 걱정되는가 보다. 나는 영철이가 정말 순대국집 할머니를 죽이고 돈다발을 빼내 튀어 버린 것인지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못마땅한 짓을 할 때마다 내가 시퉁한 표정으로 소리 지르면, 멋쩍어 하며 비실비실 물러나던 영철이가 지원세력도 없이 혼자서 사람을 죽였다는 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것도 단골로 다니던 <할머니 순대국>집 주인이라니. 그것이 사실이라면 몹시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 '사사파' 모두를 사람이나 죽이는 몹쓸 놈들로 보는 시선에는 분노가 솟았다. 태어날 때부터 사람이 다르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해대며 우리를 몰아칠 때, 내 내면에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이 들끓었다. '사사파'들의 아픔에는 관심도 없던 인간들이, 사건이 터지자 가장 쉬운 논리로 우리를 다 안다는 듯이 떠들어대는 꼴은 참아주기 힘들었다. 사태를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일만큼 천박하고 역겨운 것은 없다.



오늘 경찰이 급습할 거라는 소문이 아이들을 사십사 계단으로 불러들였다. 오후가 되면서 '사사파'들이 공터로 몰려들었다. '사사파'들은 자신들의 마지막 안식처인 사십사 계단을 지키기 위해서 모여들었다. 나와 성호도 사십사 계단에 올라왔다. 계단 입구에는 장사꾼들이 내다버린 무, 배추, 나물 쓰레기들이 허술한 무덤을 이뤄 썩어가고 있었다. 배추 시래기 속으로 쥐 한 마리가 빠르게 사라졌다. 채소가 썩는 냄새가 났고, 계단 바깥쪽에 자란 키 큰 풀들이 계단 안쪽으로 넘어와 발에 휘휘 감겼다. 엉켜있는 잡풀에 발목이 걸렸다.

공터는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사사파'들의 담배연기, 침, 이빨 사이로 내뱉은 욕, 발자국 소리를 투정없이 받아들였다. 여기저기 아이들이 누웠던 자리가 보였다. 체육복이 삐죽 나와 있는 책가방도 하나 팽개쳐져 있다. 소주병 밑에 죽어있는 고양이가 검은 털 사이로 시뻘건 내장을 내밀고 있다. 소주를 마신 '사사파'들이 죽어가는 고양이를 상대로 다트놀이를 한 모양이었다. 위액이 식도를 통해 올라오는 것처럼 비위가 상했다.

피융. 휙휙. 냐옹냐옹, 찍찍. 클클. 까르르. 돌멩이질하는 소리, 휘파람 부는 소리, 고양이 우는 소리, 병 깨지는 소리, 히스테릭하게 우는 소리, 웃는 소리, 욕하는 소리가 공터를 부풀어 오르게 했다. '사사파'들이 공터에서 난장을 치고 있다. 바람은 그 위에 중앙시장에서 데리고 온 돼지머리 삶는 냄새, 소 내장 볶는 냄새, 생선 내장 썩는 냄새를 풀어 놓았다. 투덜대며 깡소주를 입에 털어 넣거나, 계단 밑으로 오줌을 내깔기는 아이들도 있었다. 어둑한 공터 한쪽에서는 작은 연인들이 서로의 몸을 껴안고 풀 위를 뒹굴었다.

"허그다."

성호가 소리쳤다. 영철이었다. 반가움에 눈물이 쏙 빠져나왔다.

"너 어떻게 된 거야, 짭새들이 열라 찾던데."

"재수 꽝이야, 된통 얻어터졌어. 내가 할머니를 왜 죽여? 알리바이를 증명해도 두드려 패기만 하는 짭새들 몽땅 죽여버릴 거야."

영철이가 정강이를 걷어보였다. 핏줄이 터져 죽죽 금이 가 있었다. 영철이가 쇠공이 달린 줄을 휘휘 내둘렀다.

계단 아래가 시끄러웠다. 경찰차들이 계단을 에워쌌다. 경찰이 메가폰을 들고 모두 내려와 집으로 돌아가라고 방송했다. 소리는 웅웅거리며 사십사 계단 위까지 도착했다.

"돌아갈 집이 없다."

성호가 야유하듯이 소리쳤다. 성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돌수제비를 아래를 향해 날렸다. 다시 경찰의 메가폰 소리가 들렸고 아이들이 우우우우우, 함성을 내질렀다. 경찰들이 손에 방망이와 방패를 하나씩 들고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테이저 건을 든 경찰도 보였다.

"총으로 쏘겠다 이거지? 어디 한 번 해봐. 여차하면 뛰어내리면 되지 겁날게 뭐야?"

성호가 곧 떨어질 사람처럼 사십사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씨팔, 좆 빠지게 도망가게 생겼네."

성호 옆에 서 있던 남자애가 피우던 담배를 던지며 말했다.

"한 번 붙어 봐!"

담배를 던진 남자애가 가방 속에서 긴 쇠사슬을 꺼내 흔들었다. 잭나이프를 펴거나 쇠공을 꺼내드는 '사사파'들도 있었다. 토끼사냥을 하듯이 경찰이 '사사파'들을 한쪽으로 몰았다. 몇몇 아이들은 둔덕을 타고 내리굴렀다. 공터에 서 있던 '사사파'들이 우우, 하고 소리를 지르며 한쪽으로 몰리다가 버티고 섰다. 아이들이 경찰 쪽으로 돌아섰다.

"여긴 우리 영토야, 해볼 테면 해봐."

성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호가 잭나이프를 꺼내 들고 경찰에게 덤벼들었다. 영철이가 쇠공을 휘 내둘러 경찰을 위협했다. 영철이의 쇠공이 턱, 경찰의 머리를 쳤다. 경찰이 방망이를 들어 영철이를 후려치려고 하는 순간, 뒤따라 온 경찰이 테이저 건을 영철이의 팔뚝에 쏘았다. 영철이가 전극으로 팔뚝이 마비되었는지 주저앉았다. 영철이의 근육이 전극으로 마비되었다.

"힘빼, 조용히 해."

경찰이 영철이를 끌며 위협조로 말했다.

"이거 뭐야, 야, 동영상 찍어 올려, 짭새들 죽여버릴 거야."

성호가 소리 질렀다. 다른 남자아이가 핸드폰으로 영철이의 고통스런 얼굴을 찍었다. 경찰이 영철이를 질질 끌고갔다. 경찰들이 몽둥이로 아이들을 후려치며 아래로 내몰았다. 아이들이 흩어졌다. 성호가 잭나이프를 들고 영철이를 끌고 가는 경찰을 위협했다.

"다 죽여라, 죽여."

성호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조각조각 깨지고 있었다. 경찰은 몽둥이로 성호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순간, 성호의 등줄기에서 피가 흘렀다. '안돼, 멈춰.' 나는 소리 질렀다. 까망이가 나를 쫓아왔다. 까망이의 불룩한 배가 걱정됐다. 경찰들이 들고 있는 몽둥이로 까망이를 후려치거나 방패로 내리찍을 것 같았다. 까망이를 놓쳤다. 나는 헉, 숨을 들이마셨다. 까망이가 야옹거렸다. 눈에 띄는 돌멩이를 발로 찼다. 까망이가 놀라 뛰었다. 나는 이를 앙다물고 눈을 크게 떴다. 까망이가 배를 출렁거리며 뛰어가다 굴렀다. 작은 진동 때문에 돌이 굴러 까망이를 덮쳤다. 까망이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별 요망한게 신경쓰게하네,' 나를 쫓아오던 경찰이 돌덩이를 까망이 쪽으로 날렸다. 까망이 울음소리가 날카롭고 짧게 들렸다. 나는 돌덩이에 배가 납작하게 눌린 까망이를 안고 뛰었다. 까망이의 배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와 내 팔을 적셨다.

"거기 서."

경찰이 몽둥이를 들고 쫓아왔다. 나는 내리굴렀다. 돌멩이가 몸 위로 떨어졌다. 까망이를 놓쳤다. 피 묻은 돌을 주워 경찰을 향해 던졌다. 돌은 내 눈앞에 떨어졌다. 외등이 꺼졌다. 발등이 꺾였다. 아프다. 경찰이 내 한쪽 팔을 잡았다. 주머니 안에서 송곳을 꺼내 손에 쥐었다. 경찰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송곳으로 경찰의 팔뚝을 내리찍었다. 피가 튀었다. 나는 송곳을 꼭 쥐고 둔덕 아래를 향해 뛰었다. <끝>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4519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