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수의 건강&생활]소리 없는 살인자

[이길수의 건강&생활]소리 없는 살인자
  • 입력 : 2017. 11.22(수) 00:00
  • 김현석 기자 ik012@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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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한라산은 굳이 상고대가 아니더라도 그 절제된 단아함으로 행인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비발디의 겨울 1악장 같은 날이라도 돌계단들을 딛고 정상에 서면 한라산은 코끝에 스치는 짙은 겨울 냄새처럼 2악장을 들려준다. 겨울 산행의 멋은 클래식의 기품을 닮은 우아함으로 배어나와, 속인을 겨울산에 들게 한다. 하지만, 심장과 혈관을 수술하는 외과의사인 나는 쉬이 겨울 휴가를 사용하지 못한다. 차가운 겨울이 되면 평소 위험요소만 가진 채 증상이 잘 드러나지 않던 심장-혈관의 병들이 환자들에게 들이닥치기 때문이다.

새파랗게 혹은 새하얗게 질린다는 표현이 있다. 영어에도 face turns white with fear라는 말이 있어 공포에 질린 인간은 민족에 관계없이 피부색이 변한다. 의학적인 이유는 공포와 같은 외부자극에 의해 항진된 교감신경이 혈관을 수축시켜 일어나는 현상이다. 공포나 위협에 노출될 때뿐만 아니라 추위에 노출되어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냉기와 혈관 수축에 의한 피부색의 변화는 더운 여름날 차가운 바닷물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에게도 볼 수 있고 온탕에 있다가 갑자기 냉탕에 들어가는 것을 즐기는 사람에게도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혈관 수축이 심장에 무리를 주어 급격한 혈압 상승을 야기하는 것이다.

혈압과 관련되어 흔히 잘못된 상식 가운데 하나가 혈압약은 혈압이 높을 때만 먹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혈압이 과연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면 이러한 말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는지 쉽게 알아챌 수 있다. 혈압이란 동맥벽에 걸리는 혈액의 압력으로 조직으로 혈액을 밀어 보낼 수 있는 궁극적인 물리적 힘을 말한다. 따라서 지나치게 낮은 혈압은 조직으로 혈액과 그 속에 있는 영양분을 보내지 못해 세포가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쇼크상태로 악화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일상에서 늘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이와 반대로 고혈압에 노출된 조직은 처음에는 높은 압력으로 혈액이 조직으로 들어와 산소와 영양분의 공급이 언제나 무난하게 이루어질 것 처럼 보이지만, 고혈압에 노출된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조직은 과도한 관류 압력으로 말미암아 그 자체에 변성을 일으키게 된다. 이렇게 오랜 세월 노출된 병변조직은 어느 날 갑자기 찢어지거나 막히고 혹은 고유의 생리적 기능을 잃게 되어 치명적인 질병을 야기한다. 뇌졸증이 그렇고 심근경색이 그렇다. 만성 신부전이 거기에서 오고 뇌출혈이 그렇게 일어난다. 급기야 대동맥이 찢어지고 (대동맥박리증) 눈을 잃어 장님이 될 수 있다(망막박리). 그래서 혈압과 같은 만성질환을 소리 없는 살인자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과거와 달리 이런 심각한 합병증을 일으키는 고혈압 환자의 연령이 최근 들어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서구화된 식생활이나 지나친 음주와 흡연이 있을 것이고 운동 부족도 있을 것이며 고령화 사회에서의 유전적 성향도 클 것 같다. 젊어서 혈압을 가진 환자는 살아가면서 고혈압에 노출되는 시간이 더 길기 때문에 더 젊은 나이에 합병증이 생기고 이는 한창 자신과 가족을 위해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일을 해야 할 나이에 사회로부터 떨어져 있게 됨을 의미한다. 개인이나 가족, 사회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미국 심장학회에서는 이전보다 기준을 더 엄격히 한 새로운 고혈압 진단과 치료 지침을 발표했다. 수축기 혈압 130mmHg 이상일 경우 이제부터는 적극적인 고혈압의 치료 대상이 된다. 이러한 강력한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는 너무 많은 건강 과신론자들이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건강하려는 행동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고 배려입니다"

<제주한라병원 흉부외과 심혈관외과장 이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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