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시작하며]혼인지의 숙제를 거들며

[하루를 시작하며]혼인지의 숙제를 거들며
  • 입력 : 2017. 08.02(수) 00:0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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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들은 모두 땅속에 있다고 했던가. 과거 탐라족 세력의 열풍이 한낱 공항개발에 자칫하면 파괴되고 파묻힐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바라보는 열안이(온평리 옛 지명) 혼인지의 전통혼례식은 그야말로 아담하고 조촐한 행사였다. 탐라의 옛 부족장 삼을라가 벽랑국 공주 셋을 아내로 맞이해 가정을 꾸린다는 혼인지의 혼례문화는 탐라의 농경문화와 그 출발점을 같이한다고 기록은 전한다.

온평리 마을 주민들이 마을행사로 '혼인지 축제'를 통해 옛 문화의 가치를 재현하면서 그 명맥을 잇고 있을 뿐인 이곳은 다만 제2공항 개발 바람의 여파에 따른 부동산 열기를 제하고 나면 한낱 김빠진 동네유적지일 뿐이다. 역사 문화적 가치관이 조악한 그래서 개념도 없고 감각도 없이 지나치게 경제적 실익만을 따지는 윗 행정관리들의 저급한 정책 탓이다. 제2공항 개발 계획에 따르면 혼인지 주차장 절반가량이 개발예정지에 편입되며, 나머지는 전부 공원으로 조성될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 역시 순진한 '민'들의 헛된 희망일 뿐 가장 확실한 대답은 미지수다. 늘 그래왔던 '관행'은 그렇게 '민'의 뺨을 때리고 달래면서 걸어가는 '제주개발'의 길이기 때문이다. 자칫 그 옛날 위대했던 해양문명의 1번지를 자랑했던 문화유적의 원형, 단초들이 기록물로나 남겨지다가 슬며시 사라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가까운 일본 북부 규슈의 사가현에 위치한 일본 최대의 마을 유적인 요시노가리유적 사직공원의 경우 공장택지개발 공사를 하던 중에 일본의 청동기시대인 야요이 시대 유물이 출토 되자 당초 계획을 무산시키고 사직공원으로 꾸몄다. 요시노가리유적은 1986년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며 그 규모와 발굴성과는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유적에서는 일본 야요이시대(기원전 5세기~기원후 3세기) 문화의 특징과 한반도와의 교류를 증명하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됐다. 특히 이 시기 한반도의 농경문화가 일본에 전래되어 일본 고대사회 문화의 발전에 미친 영향을 밝혀주고 있다. 관계자들의 역사문화에 대한 가치관이 남달랐던 결과다.

아파트 고분을 완벽하게 재현한 나주 복암리 고분전시관의 경우 역시 1996년부터 시작해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역사문화에 대한 가치관이 정립된 리더들이 20년을 끌면서도 결국은 2016년에 완공돼 오랫동안 잠들었던 마한문화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세계적인 역사교육의 장으로 현재, 1년에 2만 명 넘게 찾는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올 4월 22일에는 '1974 백동마을 사계' 특별사진전을 개최, 지난 1974년 유명기 경북대 교수와 시마무츠히코 일본 토호쿠 대학교수가 1년에 걸쳐 조사한 인류학 기록사진을 동신대 영산강 문화연구센터와 지역 향토사학자, 다시면 백동마을 주민이 함께 분류하고 선정하는 작업을 거쳐 이뤄냈다. 사진들은 백동마을 사계로, 봄엔 모내기, 여름엔 장터와 울력, 가을엔 추수와 수매, 겨울엔 혼인과 장례 등으로 구성해 당대 주민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 잊혀져가는 마을공동체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가 됐다. 이런 성공적인 혼인지 탐라문화유적공원이라는 예비 숙제를 풀기 위해서 '문화관련 조직의 내부 키맨(key man)을 보조해 줄 수 있는 외부 키맨의 긴 호흡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곳 문화재 담당 관계자의 말이다. 무분별한 개발 여파에 따라 자연경관문화 및 인문사회역사문화의 원형들이 속속들이 파괴되고 있는 지금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제주도 행정 리더들과 문화 관련 전문 인력의 '제대로 된 공적 수행'만이 그 답을 푸는 열쇠다.

<고춘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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