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문의 에세이로 읽는 세상]다음에

[허상문의 에세이로 읽는 세상]다음에
  • 입력 : 2017. 07.19(수) 00:0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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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연구실에 나와 보니 여기저기서 온 책들이 책상 위에 가득 쌓여 있다. 빨리 저 책들을 살펴보고 보내 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답장을 보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지만 '다음에' 하고 미루고 만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와 안부 전화를 나누다가 '다음에' 밥 한 끼 같이 하자며 통화를 마친다. 한동안 청소를 하지 않아서 집안에 먼지가 날리지만 또 '다음에'로 미루고 만다. 다음에, 다음에…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들을 자꾸 다음으로 미룬다. 이것은 필자같이 게으른 사람들에게 익숙한 습관일지 모르지만, 그 내면의식에는 우리 앞에 지금이 아니라도 시간이 얼마든지 있다는 시간에 대한 무한한 기대와 믿음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정말 우리에게 시간은 무한히 존재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에는 시간이 그렇게 느리게 지나간다고 여겨져서 어머니로부터 선물 받을 날, 학교에 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루하루가 얼마나 느리고 천천히 지나가는지 시간은 언제까지나 우리 앞에 머물 줄 알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시간은 손살 같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시간은 나이 숫자 만큼 비례해서 빨리 지나간다고 하지만, 정말 시간이 화살 같이 날아간다는 말이 요즘은 실감이 간다. 하루가, 한 달이, 일 년이 금세 지나간다.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임에 틀림없다. 그래서인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간에 대한 금언은 수없이 많다. '시간은 금이다.'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은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모두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들이다.

서양 격언에 '카르페 디움' 이라는 말이 있다. 하루하루에 충실하자는 뜻의 라틴어로 우리말로는 '현재를 잡아라.' 정도로 번역되겠다. 말을 바꾸면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이 무엇보다도 확실하며 중요한 시간임을 일깨워주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철학자 M.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존재의 근원적 물음은 시간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현존재의 본질적 의미는 바로 '시간'에 대한 이해에 있다는 것이다. 시간 중에서도 지금 현재의 의미는 존재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모든 현존재는 현재에서 과거를 망각하고 미래의 사건을 예측한다. 그리하여 일상적인 의미에서는 지금 이 순간 현재의 시간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철학자들의 말을 빌 것도 없이, 우리에게 지나간 과거나 다가올 미래의 시간보다 더욱 중요한 시간은 현재 이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지나가는 매 순간순간은 정말 아쉽고 소중한 시간이다. 한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지나간 그때 무언가를 조금 더 열심히 했더라면, 그 사람을 조금 더 열심히 사랑했더라면, 부모님 생전에 조금이라도 더 효도를 했더라면, 인생은 이런 아쉬움과 회한으로 가득하다.

지나간 시간은 아무리 후회해본들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불변의 진리다. 흘러간 시간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헛되게 보낸 시간은 자기 인생의 한 부분을 헛되게 보내는 거와 같다는 말대로 지금 이 순간순간을 값지게 보내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새로운 시작의 시간이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에게 '다음에'란 없다. 하루하루가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면 어찌 단 하루인들 헛되이 보낼 것인가.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 연락해서 만나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지금 하라. '다음에'란 언제가 될지 모를 기약 없는 시간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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