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이끌어온 선각자들](19) 성이시돌목장 임피제 신부

[제주를 이끌어온 선각자들](19) 성이시돌목장 임피제 신부
이국의 낯선 땅에서 일생을 바친 '파란 눈, 돼지 신부'
  • 입력 : 2016. 11.17(목) 00:00
  • 임수아 기자 sua@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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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피제 신부

'파란 눈, 돼지 신부' 임피제(P.J Mcglinchey·89) 신부는 반백년 이상을 제주사람들과 부대끼며 제주 땅에서 인생의 황혼기를 맞았다. 때론 희망찬 가능성으로 때로는 울분과 정의로운 분노로 이룩한 공동체를 통해 제주를 일궈온 그는 제주 안의 가난을 향해 수없이 손을 내밀며 식지 않는 박애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가난한 땅 제주… 아이들에게서 희망 얻다=1954년, 아일랜드 출신 26세 청년 임피제 신부가 제주 한림본당으로 부임하던 해다. 제주도는 4·3사건과 한국전쟁 이후 사람들이 빈곤 속에서 정신적 상처를 안고 살아가던 시기였다. 임 신부는 당시 제주의 가난과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고민중 청정한 제주환경을 통해 목축업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하지만 당시 제주는 여건상 하루 먹고 살기도 빠듯했다. 그 탓에 돼지는 사육이 아닌 식량의 개념이었고 설상가상 인분을 통해 돼지를 키우는 탓에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기생충으로 인한 장애를 얻거나 일찍 죽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농한기에 마을 어른을 모아 돼지 사육 방법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안된다'는 이야기만 돌아왔다.

이때 임 신부에게 길을 열어준 것은 아이들이다. 교재를 들여와 제주에서 4H 클럽 활동을 하는 아이들과 인분을 안먹이고도 돼지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을 함께 연구하며 실습에 나섰다. 임 신부는 당시를 "4H 클럽 아이들과 같이 공부했다"고 회고한다. 4H 클럽은 그 당시 농업을 통해 청소년의 자립을 돕는 세계적인 청소년 활동이다.

임 신부와 아이들은 돼지에게 동물성 단백질을 먹이기 위해 한림항에 버려지는 생선의 머리와 내장을 모아 보릿단을 섞어 먹였다. 성당 한켠에 조그만한 농장을 만들고 육지에서 새끼를 밴 요크셔 종 어미 백돼지를 데려왔고 낳은 새끼돼지 한마리씩을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분양한 돼지가 커 나중에 새끼를 낳으면 다시 한마리를 반환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가축은행', 현재 성이시돌 목장의 시초다.

임피제 신부가 테쉬폰 건축 현장에서 공사를 지시하고 있다. 테쉬폰 건물은 임 신부가 고향 아일랜드에서 건축기술을 배워와 지은 것으로 1961년 이후 숙소·돈사·공장 등 200여 채가 보급됐다.

1962년 임 신부는 돼지의 수가 많아지자 현재의 한림읍 금악리로 거취를 옮긴다. 그 뒤에 이시돌 중앙 실습목장을 만들어 4H 클럽의 아이들 중 군대를 전역한 청년들에게 목초지 개량법과 가축 기르는 법 등 기술을 익히고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게 했다. '돼지 신부'라는 애칭도 이 때 붙여졌다.

제주땅 작은 아이들과 함께 시작한 이시돌목장은 제주지역 고용 창출 활성화를 불러일으켰고 이후에 도내 최초 한림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해 저리로 사업 자금을 조달할수 있도록 하는 등 지역개발 사업의 초석이 됐다. 임 신부는 "그때 나를 버티게 한 어린 친구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시돌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황무지 개척 농촌공동체로… 목장·의원 설립해 이웃사랑 실천
제주사람들과 부대끼며 제주에서 인생의 황혼기 맞은 종교인
"어린 친구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시돌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


▶제주 원조 위해 매일 밤 편지=임 신부는 지역주민들의 복지를 위해 누구보다 발 벗고 앞장섰다.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고향 아일랜드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원조를 해달라고 밤마다 편지를 썼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임 신부의 편지가 빛을 발한 것은 미국, 독일 등 국제적인 구호단체에 도움을 청하고부터다. 임 신부는 구호단체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고 공식적인 원조를 받았다. 그때 제주에 들어온 것이 트렉터 등 농기계로, 농기계의 도입은 제주지역 목장 활성화의 원동력이 됐다.

4H 클럽 아이들이 양돈 교육을 받고 있다. 제주 4H 클럽은 임피제 신부에 의해 1957년 3월 처음으로 설립됐다. 4H는 머리(Head), 가슴(Heart), 손(Hand), 건강(Health)에서 머리 글자를 따온 것이다. 사진=(재)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 제공

또한 1960년대 초 골롬반 수녀회에 편지를 써 수직 기술자를 제주로 불러들여 목장에서 키우던 양의 털로 스웨터와 담요 등을 만드는 방법을 도민들에게 전수했다. 이후 양털을 이용해 옷을 짜는 한림수직을 설립해 젊은 여성들의 일자리 창출에도 일조했다.

낙후된 의료 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1970년 의사 면허가 있는 수녀를 원장으로 모셔와 성이시돌 의원을 개원한 것도 임 신부의 몫이었다. 당시 한림에는 변변한 의료시설이 없었고 제주시와 서귀포시에 딱 한 곳씩 있는 의원 또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주민들은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성이시돌 의원은 제주시 애월, 한림, 한경 등 제주시 서부지역 주민들에게 병원치료의 길을 열어줬다. 극빈층에게는 F 표시(Free 라는 뜻)를 해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호스피스' 새로운 가난에 직면하다= 임 신부는 오늘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제주사회에서 남은 새로운 가난의 형태가 '죽음'이라고 말한다. 1960년대 제주가 목축산업을 통해 빈곤한 현실을 탈피했다면 현재의 제주는 죽음을 앞두고도 쉴 곳이 없는 가난한 병자들의 임종을 돌봐 줄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은 존엄하게 생을 마감할 권리가 있으나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런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차별"이라고 했다.

임피제 신부가 미국 텍사스 주 휴스턴에서 한국을 위한 모금활동을 벌이고 있다. 모금함에는 '돼지 신부'라고 쓰여져 있으며 모금된 후원금은 한국 사람들의 자립을 돕기 위한 돼지 구입에 쓰여졌다.

임 신부의 사회적 소외 계층의 복지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현재의 '호스피스' 사업으로 연계됐다. 호스피스 형태는 70년대 당시 이시돌 의원에서부터 이어졌는데 의료혜택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농어촌 주민들에게 병원 문턱을 낮춰주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직원들과 함께 말기 암환자, 요양이 필요한 무의탁 환자들의 집을 방문해 진통제를 투여하고 식료품을 나눠주는 등의 활동을 이어왔다. 지난 2002년부터 이시돌복지의원 내에 무료 호스피스 병동을 마련하고 죽음이 가까운 가난한 환자들의 육체적·심리적 고통을 덜어주며 편안하고 존엄한 임종을 돕고 있다. 시설에 드는 비용 전액은 이시돌목장의 사료공장과 종마사업에서 나온 수익금으로 충당한다. 고향 땅이 아닌, 이국의 낯선 땅에서 올곧이 청춘과 인생을 바친 종교인, 임 신부의 크나 큰 자기 희생과 아름다운 인간애가 초겨울 더욱 빛나고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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