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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이끌어온 선각자들
[제주를 이끌어온 선각자들](18) 한국 대표 서예가 소암 현중화
연습지에 쓰고 또 쓰다… "삶과 예술이 하나였던 예술가"
이태윤 기자 lty9456@ihalla.com
입력 : 2016. 11.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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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연마로 독자적 행초서·파체 완성
대한민국 서예 흐름 선도한 전설적 인물
소암 필법 전승 위한 '소묵회' 곳곳 조직
별세 10여년 뒤 창작 산실엔 소암기념관


평생 제주를 사랑하고 글씨를 벗하며 살았던 예술가 소암 현중화 선생.

"나는 후대의 평을 두려워한다. 가까운 인연으로 나를 좋게 평하는 사람이 없어져야 참된 평이 나올 것이다."

평생 제주를 사랑하고 글씨를 벗하며 살았던 예술가 소암(素菴) 현중화(1907~1997). 그가 떠난 지 벌써 1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자리엔 존경과 그리움이 채워져 있다. 소암 선생은 삶과 예술을 조화롭게 일치시킨 예술가로 전해진다. 삶에서 예술혼을 느낄 수 있고, 예술에서 삶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늦은 나이에 서방정토로 돌아가는 하얀 늙은이라 스스로 부르며 마지막까지 글을 썼다. 육조해(六朝諧)와 행초서의 이질적 요소와 미감을 혼융시킨 독특한 예술세계를 완성하며 서체에 생명력과 다양성을 제공한 예술가로 한국 서단의 큰 획을 그었다.

1907년 서귀포시 법환동에서 태어난 소암 선생은 5남 4녀 중 장남으로 성장했다. 그는 제주농업학교를 1학년 말 중퇴하고, 1924년 쓰던 붓 한 자루 들고 일본에 건너갔다. 이후 소암 선생은 학비를 스스로 마련하며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백화점 점원, 국회의원 수행원, 광산회사 사무원, 동경 대정중학교 교사 등을 지내며 학문에 정열을 쏟았다.

서귀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제자들과 함께 나선 소풍에서 기념촬영한 모습.

일본 광산회사 재직 당시 소암 선생은 자원해 마쓰모도 호오수이 선생 밑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소암 선생이 서예의 대가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스승은 육조체의 대가 쓰시모도 시유우 선생이었다. 그는 8년 동안 쓰시모도 시유우 문하에서 육조체와 해서·행서·초서·전서·예서 등 각 서체를 배우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소암 선생은 어려운 환경에도 학문에 힘을 쏟으면서 서예를 평생 직업으로 택했다. 젊은 시절의 수많은 경험과 두 스승의 전법 등으로 인해 그의 인생 여정은 명예도 권세도 없는 예술의 길로 결정된 것이다. 특히 소암 선생은 한국에 들어오기 전, 일본에서부터 이미 글씨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서도전 등 여러 곳에서 입선하며 일본서도원 대의원과 동경대동서도연맹 상무이사 겸 심사위원을 맡았다. 녹담 서원을 설립해 일본인을 지도하기도 했다.

앞뒤가 새까맣도록 쓴 연습지가 쌓여 천장에 닿으면 정방폭포 인근 바닷가를 찾아 연습지를 태웠던 소암 선생.

그는 49세가 되던 해인 1955년, 그간 수집하고 공부했던 법첩집을 들고 단출하게 한국으로 귀향했다. 같은 해 고향의 고모부인 강성익이 서귀포에 남주고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와달라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남주고등학교는 건물만 지어놨을 뿐, 일을 시작할 단계는 아니었기 때문에 소암 선생은 제주 유일의 교원양성학교인 제주사범학교에 한문 서예 교사로 취직했다. 제주대학교 강단에 올라 윤리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소암은 1957년 51세라는 늦은 나이에 국전에 입선하며 서단에 발을 내디딘 후 다양한 실험과 창작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서귀중학교 교사로 이직하던 해인 1957년의 제6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국전'에서 예서작품 십오야망월(十五夜望月)로 입선하는 등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다. 1960~1961년에는 제9회·제10회 국전에 추천작가로서 출품했으며, 57세가 되던 1963년에는 제12회 국전에 심사위원이 됐다. 1965~1966년에 열린 제14회·제15회 국전에서는 추천작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특히 이때 영주연묵회(瀛州硏墨會)를 발기했고, 목포에서 제1회 개인전도 개최했다. 국제적 활동으로는 1977년 한일전 출품 이래 대만 기륭시서법회 주최 국제전, 대북 서법계 순방, 안진경서법회전 등에 초대 출품한 바 있다. 특히 중화민국 국립역사박물관 초청서법전은 큰 호평을 받았는데, 이 작품들은 귀국 후 고향에서도 전시됐다.

1973년 동양의 전통 예술인 서법을 연구하고 소암 선생의 묵적 연마와 필법을 전승, 발전시켜 서예의 일가를 이루려는 데 목적을 둔 제주소묵회가 조직됐다. 또한 별도의 회칙으로 운영되는 소묵회가 우리나라 각 지방별로 구성됐다.

불도 안 땐 조범산방에 정좌하고 법첩 임서에 주야정진한 소암 선생.

소암 선생은 노후까지 불도 안 땐 조범산방에 정좌하고 법첩 임서에 주야정진했다. 연습지를 앞뒤로 새까맣도록 거듭 쓰고 천장에 미치면, 정방폭포 인근 바닷가를 찾아 태웠다.

소암 선생은 소전 손재형, 일중 김충현, 검여 유희강 등과 함께 한국근현대 서단을 이끈 거장중의 한 사람이다. 일제시대 서예가로는 드문 유학파로 3·40대에 20세기 시대서풍인 육조해를 가장 먼저 체득, 5·60대 귀국 후 국전을 무대로 행초서를 전예와 육조해로 혼융해 냄으로써, 7·80대 서귀소옹 시절 독자적인 행초서와 파체를 완성해 냈다. 1997년 12월 3일 90세의 나이로 소암 선생은 운명했지만 여전히 그는 동아시아 세계 서예 흐름을 선도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2008년 문을 연 소암기념관은 소암 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문화공간이다. 이곳에서는 현재 총 554점의 선생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서예 467점, 한국화 76점, 기타 11점이다. 소암의 거처를 품고 지어, 여느 공간에 있는 전시실 뿐만 아니라 창작실이 더해졌다. 방의 주인이 잠시 외출을 떠난 것처럼 소암이 머물던 '조범산방'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서귀포가 낳은 서예 대가 소암 선생의 독자성 강한 작품은 제주를 대표하는 것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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