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이끌어온 선각자들](14)산악인 오희준

[제주를 이끌어온 선각자들](14)산악인 오희준
오르고 또 오른 지독한 산 사랑… 그 산 위에 별이 되다
  • 입력 : 2016. 10.13(목) 00:00
  • 양영전 기자 yj@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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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토평동 출신의 산악인 오희준. 서른 일곱 되던 해에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산 위에서 별이 된 그는 '적토마'라는 별명처럼 히말라야 8000m급 10개봉을 단 한 번의 실패 없이 오르는 진기록을 세우고 북극과 남극점까지 도달하는 등 멈추지 않는 도전정신을 보여줬다.

제주대 산악부 활동 계기돼 산악인으로 입문
히말라야 8000m급 10개봉 연속 오른 진기록
에베레스트 남서벽 루트 개척하다 목숨 잃어
2007년 기념사업회 창립… 매년 추모제·산행

지난해 말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산악인들의 뜨거운 의리와 모험을 그려낸 영화 '히말라야'가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당시 영화의 영향으로 산악인들의 삶이 많은 관심을 받은 바 있다. 고(故) 오희준 산악인도 당시 매스컴에 오르내리며 회자됐었다. 제주 출신인 그는 44일만에 남극을 원정해 세계 최단 기간 성공 기록을 세우고, 도보로 54일만에 북극점 도달에도 성공했으며, 에베레스트(8848m) 정상에도 올라 지구 3극점을 밟았다. 이를 통해 제주 도민들이 무한한 자긍심을 느끼기도 했다. 산을 그토록 사랑했고, 그 산 위에 별이 된 사나이 오희준. 그는 제주인의 선구자적 개척 정신을 국내외에 심어주었다.

▶도전하는 산마다 성공률 100%=그는 1970년 8월16일 제주도 서귀포시 토평동 1591번지에서 아버지 오성호, 어머니 강옥연 사이에 3남 1녀중 삼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토평초등학교, 서귀중학교, 서귀고등학교를 차례로 졸업했다. 1989년 3월 제주대학교에 입학해 곧바로 제주대학교 산악부에 가입하면서 등산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오희준은 현재 제주도 산악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오한철의 사촌동생이다. 오희준이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그는 사촌형님의 등산 무용담 듣기를 즐겨했다. 이를 계기로 자연히 산을 친숙히 여기게 됐고 대학 진학 직후, 대학 산악부에 발을 들여 놓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듬해 일본 북알프스 동계 등반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산악인으로서 출발을 알렸다.

오희준(맨 오른쪽)은 2004년 살인적 추위와 거센 바람을 이겨내며 박영석 대장 등과 함께 44일만에 남극점에 도달했다.

그로부터 9년 뒤, 오희준은 생애 최초로 8000m급 봉우리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그는 1999년 8월20일 강성규, 김상조, 문봉수와 함께 히말라야 초오유(8201m) 원정 등반에 나서 9월26일 오후 3시30분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그는 정상에 올랐던 26일자 초오유 등정기에 "정상설릉은 허리까지 눈이 차오르고 그 와중에 셀파들도 퍼지기 시작하더니 더 이상 못가겠다고 했다"라고 적었다. 이어 "겨우 (셀파들을)달래고 출발했지만 걷는다기 보다는 기는 것에 가까웠다"고 정상 정복까지 험난했던 여정을 기록했다.

그는 2000년 7월과 10월에 각각 히말라야 브로드피크(8047m), 히말라야 시샤팡마(8031m)를 등정했다. 이어 2001년 4월과 7월에는 히말라야 로체(8516m)와 히말라야 K2(8611m) 정복에 성공했다. 이후 안나푸르나(8091m), 에베레스트(8848m), 가셔브룸 1봉(8068m), 가셔브룸 2봉(8035m), 마나슬루(8156m) 정상에도 올라 히말라야 8000m급 10개봉을 단 한 번의 실패 없이 오르는 진기록을 세웠다. 마침내 북극과 남극, 양 극점까지 섭렵하며 도전하는 봉우리마다 성공률 100%를 달성했다. 과연 그의 별명이었던 '적토마' 다웠다.

2010년 5월 16일 오희준 추모탑 앞에서 열린 3주기 추모제에서 동료 산악인들이 헌화하고 있다.

▶에베레스트 품 속에 잠들다=오희준은 2006년 올해의 제주인에 선정되고, 이듬해에는 베링해협 횡단에도 성공하며 산악인으로서 탄탄한 커리어를 구축해갔다. 이미 많은 고산들을 섭렵했고 많은 기록도 남겼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2007년 에베레스트 초등 30주년을 기념해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대장 박영석) 부대장으로 코리언 신루트 개척에 나선 것이다.

에베레스트 남서벽의 경우, 세계 3대 난벽 가운데 하나로 수직고도 2500m의 직벽을 올라야만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오희준은 이 난벽에 코리언 루트라는 새로운 길을 만들겠다고 떠났다. 이미 수 많은 산악인이 목숨을 잃었던 곳이기에 주변에서 우려가 컸다. 난관을 헤치고 오희준과 이현조 대원은 7700m 고지까지 올랐다. 남서벽 신루트 개척 완성을 코 앞에 둔 시점이었다. 이들은 이 곳에서 벼랑의 제비집과 같은 아슬아슬한 텐트를 쳤다. 하지만 결전의 날을 앞둔 새벽, 소리없이 흘러내린 눈사태는 이들의 목숨도 함께 앗아갔다. 2007년 5월16일, 그의 나이 37세 때였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산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인정 (사)대한산악협회 명예회장은 "오희준은 북극과 남극은 물론 히말라야 10개 봉우리를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올랐다. 이현조는 라인홀트 메스너 이후 단 한 사람의 발길도 허용하지 않았던 낭가파르밧의 디아미르 벽을 횡단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그들이었기에 당시 에베레스트 남서벽의 코리언 루트 성공이라는 낭보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고 당시 심정을 전했다. 이 회장은 "에베레스트의 여신은 순결한 두 젊은이의 영혼을 설산 깊숙한 곳에 품고야 말았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그의 뜻을 기려 나가다=오희준의 친지와 선배·후배·동료 산악인 등이 뜻을 모아 2007년 9월29일 창립한 사단법인 산악인 오희준 기념사업회는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운영되고 있다.

사업회는 오희준의 고향인 서귀포시 토평마을 사거리에 그를 기리는 추모탑을 세웠고, 오희준 공원도 조성했다. 또 매년 추모제와 추모산행도 이어오고 있다. 김대준 사업회 이사장은 "희준이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또래 학생들을 대상으로 청소년산악캠프를 운영하며 안전한 산악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오영훈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제주시을)은 "일본의 경우에는 산악인들에 대한 예우가 남다르다. 기념관 건립이나 기념사업회 등이 활성화 돼 많은 이들에게 산악인의 삶을 알리고 오랫동안 기억한다"면서 "반면 우리나라는 박영석 기념관 건립 등 노력은 하고 있으나 아직은 (산악인들에 대한 예우가)많이 부족한 실정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제주출신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오희준과 관련해 유품전시회 등을 개최한 바 있고, 앞으로도 그의 뜻을 기리고 기억하기 위해 사업 추진 등을 노력해 나갈 예정"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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