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칼럼]어느 농부의 편지

[한라칼럼]어느 농부의 편지
  • 입력 : 2016. 09.27(화) 00:00
  • 편집부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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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트랙터를 몰면 핸들과 땅을 파헤치며 돌아가는 로터리까지 녹여버릴 것 같은 무더위도 흐르는 시간에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시간이 지난 그 공간에는 가을이 내려 앉아 훨씬 차분해졌습니다. 식물이 과연 공존이라는 생태적 본능이 있을까. 아니면 본능에 충실할까.

형! 농사를 잘 짓지도 못하지만 땅을 파며 식물을 가꾼이후 계속 품어온 의문이며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저가 심고 가꾸는 식물을 제외하고 다른 풀들은 잡초로 보이던 시기와 잡초도 약초라고 여기던 때를 거치면서 지금은 그 때 그 때 마다 다르게 여기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가 말씀 드리는 본능이라는 말은 살아야 한다는 생존경쟁과 후손번식 따위 등입니다. 요새 식물들은 자기만을 생각하지 다른 식물에 눈을 돌리거나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땅을 기어가거나 그 주변에 있는 나무를 기어 올라가는 덩굴식물들도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식물을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니니까요.

형! 우거진 잡초를 제거해 밭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심은 약초는 생각만큼 빨리 자라지 않습니다. 예전 이곳에서 자라던 터줏대감(?) 풀들이 항상 먼저 솟아납니다. 이 역시 본능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상황이 맞으면 언제든지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빠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보리나 콩을 심었더라도 마찬가지여서 인간이 머리를 쓴 것이 바로 농약입니다. 제초제 같은 농약을 써서 그들이 자라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약초는 농약을 쓸 수 없고 보면 너무 짧고 쉽게 약초농사를 생각했어요. 올해는 약초를 심다가 남은 좁은 공간에 고추와 가지, 토마토와 오이를 심어 키워봤는데 반타작도 못했습니다. 약초 옆이라는 이유로 농약을 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여전히 초보농사꾼인 원인이 가장 컸습니다. 노련한 농부들이 식물이 저항하고 클 수 있도록 퇴비를 만들고 자신만의 비법을 가지고 농사짓는 농법에 존경을 표할 수밖에 없습니다.

형! 그래도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은 시간이라는 요소와 공간이라는 조건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작과 결과 사이에는 반드시 과정을 동반하고 과정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평소 그것을 인정하기란 쉬운 일도 아닙니다. 식물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벌과 나비를 불러들여 열매를 맺는 것도, 농부의 수확도, 그의 땀만이 아니라 하늘과 태양과 별과 바람과 비, 심지어 가뭄이라는 과정의 도움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은 저를 포함한 인간의 탐욕도 본능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 탐욕은 식물이 살 수 있는 공간을 점점 좁게 만들고 우리를 피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이 함께 할 수 있는 '친환경적 개발, 지속 가능한 개발'을 하겠다던 위정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그 초심은 사라지고 자연을 파헤치고 있는 것은 형도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우리 같은 농민은 밭을 떠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도시노동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길게 보면 산과 들, 바다를 바꿔 풀과 나무, 곤충이 살지 못하도록 하는 이 엄청난 개발 앞에는 도민이라고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위정자들만 잘못하는 것도 있지만 이를 거부하고 저항하지 못하는 저의 탓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서 안보라면 모든 게 통과되는 시대에서 또 헛된 걱정으로 나라를 어지럽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형! 가을 햇살이 억새 사이로 정직하게 내리쬐는 9월도 이제 끝자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송창우 약초농사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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