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자존, 한라산을 말하다](9)제2부 한라산의 인문학

[제주의 자존, 한라산을 말하다](9)제2부 한라산의 인문학
"수백년 역사가 흐른 듯 쌓여 그곳에 남았네"
  • 입력 : 2016. 07.04(월) 00:00
  • 김지은 기자 jieun@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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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백록담에는 수백 년 전 옛 선인들의 발자취가 마애명으로 남아있다. 사진은 백록담 동벽에 있는 김종보 일행 마애명. 제주사람인 김종보는 조선 순조 때의 무신으로 1811년 신미년을 전후로 무과에 급제한 인물들과 같이 한라산에 올라 마애명을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강경민기자

② 신선의 길에 새겨진 마애명


수백 년의 시간은 마치 흐르지 않은 듯 자리하고 있었다. 한라산 백록담 암벽에 새겨진 마애명을 마주하니 무수한 시간이 한걸음에 다가왔다. 헤아리기도 힘든 옛일이 선명해 지는 건 500년의 발자취가 오롯이 새겨져 남았기 때문일 게다.

한라산은 예부터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겨졌다. 지금처럼 쉬이 오를 수도 없었기에 누군가에는 미지의 세계이자 동경의 공간이었다. 조선 후기 문신인 조관빈(1691~1757)은 제주로 유배 와 한라산을 오른 소감을 이렇게 썼다. "어렸을 적부터 이미 신선의 산이라 불리는 한라산이 탐라에 있다고 들었다. 일찍이 그곳을 한 번 유람해 보는 게 소원이었지만 큰 바다가 그곳 사이에 있고 험하고 또 멀었다."

쉽게 닿을 수 없었기 때문일까. 선인들은 제 발자취를 마애명으로 남겼다. 백록담 암벽에, 탐라계곡에 돌을 깎아 이름이나 시를 적어 흔적을 남긴 것이다. 1767년 제주에 귀양 왔다가 두 달 만에 풀려난 임관주(1732~?)는 바로 한라산에 올라 이런 내용의 한시를 남겼다. '망망한 창해 드넓은데 / 한라 봉우리 떠있구나 / 백록을 탄 신선 기다리는데 / 난 오늘에야 정상에 올랐네.'

한라산 백록담·탐라계곡에 남은 500년의 발자취
지배계층 등 풍류의식으로 섬 안에 마애각석 새겨
한라산 인문학 가치 발견 이야깃거리… 보존 필요


제주특별자치도 한라산연구소(현 세계유산·한라산연구원)는 2014년에 펴낸 '한라산 마애명'에 성리학적 가치로 무장한 지배계층과 유배인들은 그들 방식의 풍류의식을 제주섬 안에 마애각석으로 새겼다고 적었다. 마애명을 새기는 게 그 당시 풍조였다거나 또는 자신의 우월적 위치를 과시하거나 제 이름을 후세에 남기고 싶었던 욕망의 발현이라는 해석도 있다. 제주에선 한라산 외에도 용연, 방선문 등에서 마애명을 만날 수 있다.

조정철 마애명은 백록담 못가에 자리하고 있다. 백록담 동벽 조관빈·조영순 마애명 근처에 있다가 이곳으로 굴러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애명 보존이 필요한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마애명을 남긴 것은 옛 관리나 유배인만이 아니었다. 세계유산·한라산연구원에 따르면 현재까지 한라산천연보호구역에서 발견된 마애명은 모두 35개로,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에 31개, 한라산 북면 가운데 있는 탐라계곡에 4개가 있다. 이 중에는 1757년 영조 때 제주목사로 부임한 조위진(생몰년 미상)과 같은 지배층과 조선 중종 때 문신인 김정(1486~1521)처럼 유배인의 마애명이 다수 포함돼 있지만 병술년에 한라산을 오른 손경오 일행 등 행적을 알 수 없는 인물의 것도 존재한다.

한라산 마애명 중에 시기가 가장 이른 김정 마애명(1521년 추정)처럼 해당 인물이 실제 한라산을 올라 이를 남겼는지 학자 간에 의견이 엇갈리는 사례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의 마애명이 역사적인 자료가 되고 한라산의 숨은 이야기를 찾는 데 단초가 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마애명을 통해 그 인물을 뒤쫓다 보면 그 당시 한라산에 대한 인식, 한라산의 옛 풍경 등을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 있다. 이는 곧 오늘날 한라산의 역사 문화적 가치를 알리는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는 데 마애명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일부 학자들과 연구진에 의해서만 조명됐던 마애명의 가치를 대중화하는 일은 한라산의 또 다른 모습을 선뵈는 일이다.

마애명 보존에 대한 논의도 시작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백록담 동벽에서 못가로 굴러 떨어지면서 파손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시대 문신 조정철(1751~1831) 마애명은 그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백록담에서 발견된 마애명 31개 중에 20여개가 성판악 등산로와 인접한 백록담 동벽에 몰려있는데, 탐방객 등의 영향으로 언젠가는 무너져 없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수백 년 역사의 흔적이 한라산의 가치를 더할 수 있도록 하는 고민이 필요한 때다.특별취재팀=강시영 선임기자·강경민·김지은·김희동천·채해원·강경태·강동민기자





전문가 리포트고윤정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한라산연구원


한라산 마애명 조사 어떻게 이뤄졌나


세계유산·한라산연구원은 2014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자 국가지정 문화재인 한라산천연보호구역을 중심으로 백록담 내에서 31건, 탐라계곡에서 4건, 명승 제92호인 방선문계곡에서 65건 등 총 100건의 마애석각문(磨崖石刻文)인 마애명(磨崖銘)을 조사해 발표했다. 이들 마애명 자료는 이전에 다른 조사자에 의해서 발견된 것도 상당 부분 포함하지만, 약 2년간의 현지조사와 탁본조사를 통해 다수의 마애명과 기존자료의 오류를 수정하는 성과를 거뒀다. 백록담과 탐라계곡의 마애명 자료는 올해 초 전시회도 개최해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본보 특별취재팀이 고윤정(사진 오른쪽) 세계유산·한라산연구원과 지난 4월말 한라산 백록담 동벽 일대에서 마애명을 둘러보고 있다.

마애명은 자연암석에 모두 한자로 음각됐으며, 대부분 세로쓰기로 새겨져 있으나 간혹 가로쓰기도 발견됐다. 주로 한라산을 오른 이의 이름자가 대부분이었다. 한자원문은 우상에서 우하, 좌상에서 좌하 순으로 판독했다. 인물판독은 우측의 인물을 선두로 좌측의 인물들을 동행인으로 분류했다. 관련 인물의 행적자료를 찾는 작업은 인물사적 접근에서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시대는 16세기초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고루 분포하는 양상을 보인다. 예컨대 1521년 제주유배인 김정(金淨)의 이름자부터 1966년 정우식(鄭雨湜) 제주도지사 일행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조선후기에 새겨진 마애명으로 파악되지만 판각의 시기 및 인물의 족적에 대한 검토는 보강이 필요하다.

백록담 내의 마애명은 단단한 현무암층을 이루고 있는 동릉 정상에 다수가 밀집돼 있다. 대부분이 제주에 부임해온 제주목사 및 판관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지식 있는 유배인의 이름자도 확인된다.

한라산의 마애명에서는 예로부터 신선들의 산으로 불리어 온 한라산에 오른 목민관들의 풍류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알려진 바와는 사뭇 다른 제주유배생활의 이면과 옛 선인들의 산수유람의 마음가짐 또한 되새겨볼만 하다.

한라산의 마애명은 보호하고 보존돼야 할 가치가 높다. 한라산의 역사문화자원으로서의 가치 및 향토사적 연구대상으로도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급증하는 한라산 탐방객과 자연풍화로 인해 파괴되고 사라질 위험에 노출돼 있어 보호대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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