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원도심, 이야기의 발견](17)군산 도시재생

[제주 원도심, 이야기의 발견](17)군산 도시재생
  • 입력 : 2014. 11.11(화)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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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 월명동 골목길에서 아스라한 옛 이야기가 흘러나올 것 같다.

돌볼 여유 없던 낡은 거리가 '1930 시간여행지'
5년 걸쳐 군산항 주변 장미· 월명동 근대문화유산 정비
일제 수탈 흔적 담긴 등록문화재 등 원도심 탐방지 각광

차가 드나드는 골목에서 한발 비켜섰더니 빈집이었다. 동네 주민과 화가들의 손길을 거친 담벼락엔 고운 빛깔을 입은 친숙한 그림들이 내려앉았지만 골목 안 대문을 열고 들어선 풍경은 그와 사뭇 달랐다. 가재도구들이 그대로인 채 사람만 빠져나간 듯 했다.

전라북도 군산시 월명동. 원도심 재생을 위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지역이지만 도시는 또다른 얼굴을 품고 있었다. 오래된 건물이나 그 터에 뼈와 살을 덧붙이는 작업이 한창이지만 아직도 목마른 공간이 많았다. 차츰 말라서 부스러지던 도시가 몇 년 전부터 바뀌고 있지만 볕이 안드는 곳도 있었다.

창작문화공간 '여인숙'에서 열리고 있는 입주작가 릴레이 작품전.

인구 27만명의 도시 군산. 그곳은 지금 '근대문화도시'를 조성하기 위한 걸음으로 바쁘다. 1899년 5월, 전국에서 여섯번 째로 개항한 군산항을 중심으로 분포됐던 근대문화유산을 되살려내 이를 도시의 자원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이는 근대문화유산이 도시의 쇠퇴와 함께 잠들어있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군산항 주변 장미동, 월명동은 한때 군산 최고의 경제·행정 중심지였지만 도시가 팽창하고 군산 신항 등이 개발되면서 그 지위를 신도시에 내줘야 했다. 근대문화도시는 군산시가 예전의 북적댔던 열기를 원도심에 다시 지피기 위해 고안한 도시의 새로운 브랜드였다.

군산시 원도심에 자리잡은 창작문화공간 '여인숙'.

▶채만식의 '탁류'가 전하는 식민지 시대상=금강 어귀 군산항은 일제의 강제개항으로 외국인 치외법권 구역인 조계지가 생겨난다. 평화롭던 어촌은 하루 아침에 파헤쳐진다. 그 땅에 뿌리박고 살던 민초들은 변두리로 밀려나야 했다. 그 삶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군산이 낳은 소설가 채만식의 '탁류'. 군산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은 이 소설엔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채 탁한 물결에 휩쓸려 살아가야 했던 식민지의 시대상과 우리 민족의 모습이 흐른다. 타락한 은행원인 주인공 고태수의 일터가 바로 조선은행이었다.

군산시 장미동에 있는 근대건축관은 옛 조선은행군산지점에 들어섰다. 한국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건축가인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설계해 1922년 완공했다. 일제의 강제 수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이다. 조선은행의 역사를 담은 전시 코너엔 '이 금고가 채워지기까지 우리 민족은 헐벗고 굶주려야 했다'는 큼지막한 문구가 내걸렸고 근대건축관 2층 입구엔 쌀을 수탈해가는 일본인이 조선인 지게꾼을 발로 밀치는 조형물이 눈앞을 막는다.

군산시가 '탁류길'이란 이름으로 일제강점기가 남겨놓은 문화유산을 밟아가는 여로를 만든 일은 그래서 한편으론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돌볼 여력이 없어서 내팽겨쳤던 건물이,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던 아픈 흔적이 높다란 아파트로 둘러싸인 원도심을 재생하는 원동력 노릇을 하고 있어서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근대문화도시 조성사업을 통해 근대건축관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진선희기자

▶건축관·미술관·공연장 등 속속 변신=군산근대역사벨트로 묶인 군산내항 일원에 흩어진 원도심의 근대문화유산은 한 둘이 아니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옆엔 전라북도기념물로 1908년에 준공된 옛 군산세관이 자리했다. 군산근대건축관과 근대미술관(옛 일본제18은행군산지점)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1930년대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에서 쌀을 보관하던 창고는 장미(藏米)공연장으로 개보수됐다. 일제강점기 무역회사 건물인 미즈상사는 커피향이 있는 미즈카페로 다시 태어났다. 근대문화벨트 지역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도보로 20~30분 정도면 이동할 수 있는 신흥동 일본식가옥, 동국사 대웅전 역시 일본 건축 양식을 확인할 수 있는 등록문화재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같은 문화유산을 따라 일본식 가옥을 체험할 수 있는 숙박시설도 세워졌다. 군산시에서 건립해 민간에 임대한 월명동의 고우당이 대표적이다. 일부 남아있던 일본식 가옥을 주축으로 다다미방으로 리모델링해 놓았다. 주말엔 방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다.

일본식 가옥을 체험할 수 있는 숙박시설 고우당

전라북도문화재인 옛 군산세관

군산근대건축관 내부

'1930년대 근대군산 시간여행'을 주제로 내건 근대문화도시 조성사업에 투입된 예산은 2009년 이래 지금까지 630억원이 넘는다. 최근 5년 동안 방치됐던 건물이 속속 새 옷을 갈아입은 셈이다.

▶인프라 중심 투자 소프트웨어 빈약 지적=도시의 오래된 거리에 사람이 몰려들면서 군산 원도심 재생사업은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일각에선 우려도 나온다. 보여주기식 건물은 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는 점 때문이다. 인프라 중심의 원도심 재생이 갖는 한계로 보인다. 원도심 '맛의 거리'에 위치한 건물 입면을 일본식으로 조성하는 과정에 음식점 간판을 너나없이 비슷하게 만든 일은 한 예다. 지자체가 정해놓은 일정한 지역에 적지 않은 금액이 투입되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원풍경을 해치는 일이 될 수 있다. 동네 사람들과 상인들의 숨결을 담아낼 때 '드라마 세트장' 같은 거리가 아닌 살아있는 도시가 되지 않을까.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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