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당굿 기록](19·끝)와산리 불돗당

[제주당굿 기록](19·끝)와산리 불돗당
"아이의 포태와 출산뿐만 아니라 육아와 치병까지 관장"
  • 입력 : 2013. 12.12(목) 00:00
  • 김명선 기자 nonamewind@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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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산리 불돗당에는 신석(神石)이 자리잡고 있다. 단골들은 신석주변에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올리고 한해 가족의 무사안녕을 기원한다. 김명선기자

옥황상제 막내딸인 '불도삼승또'가 좌정한 곳
28년전부터 이용옥·김윤수 심방이 당제 집전


매년 음력 3월의 셋째날에는 제주시 와산리 불돗당에서 당제가 열린다

와산리 불돗당은 옥황상제의 막내딸인 '불도삼승또'가 하늘에서 하강해 좌정한 곳의 신석(神石)을 중심으로 신당을 형성한 곳이다. 당신은 아이의 포태와 출산뿐만 아니라 육아와 치병까지 두루 관장하는 신으로 제주 지역 무속신화에 나오는 삼승할망과 매우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와산리의 옛 지명인 눈미, 또는 눌미의 당오름 밑에 자리한 데서 눈미 불돗당, 눌미 볼돗당, 웃당이라고도 한다.

와산리 불돗당은 와산리 삼거리에서 동남쪽 1.2㎞ 지점에 위치해 있다. 당집 뒷편으로 당오름이 있는데 아마도 불돗당이 들어서면서 이름이 당오름 변한 것 같다는 단골의 설명이다. 당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누워 있는 산(와호산(臥乎山))이라는 데서 누온미, 눈미(와산(臥山))라고 했단다.

와산리 불돗당의 메인심방은 이용옥 큰심방이다.

이 심방은 남편은 4대째 무업을 이어오고 있고,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의 기능보유자인 김윤수 큰심방이다. 이 심방 또한 외가가 이름을 널리 알린 심방이 많이 배출됐다.

이 심방 부부의 수양어머니인 고 고군찬 심방이 돌아가시면서 28년전부터 이들이 와산리 불돗당제를 집전하고 있다. 수양어머니인 고 심방 또한 제주에서 굿을 잘해 이름을 날리던 큰심방이었다.

당제가 열리는 날 심방들은 신석이 있는 당집에 들어가기에 앞서 당오름 중간에 위치한 샘물머리에서 삼석울림을 한다. 샘물머리는 '불도삼승또'가 좌정하기에 앞서 지나온 곳으로 심방들은 이곳에서 삼석을 울려 신을 모셔간다.

당제가 열리는 날이면 와산리 마을의 단골외에도 결혼 후 아이를 못가져 마음을 태우는 여성이나, 자녀의 건강에 이상이 있는 부모들이 찾아 신에게 정성을 드리기도 한다.

당제가 시작되면 심방이 본풀이를 하는데 우선 불돗당 본풀이를 먼저하고 다시 알당 본풀이까지하는 것이 이곳만의 특징이란다.

15년전쯤에는 신석의 가운데 부분이 누군가에 의해 깨지는 일이 있었는데, 현재까지도 어떠한 이유에서 누가 그랬는지 정확히 이유를 모르고 있다.

특히 와산리 불도당제가 마무리될 쯤에는 산신놀이가 행해진다.

산신놀이는 수렵과 목축의 신인 '백중와살'이란 산신을 위하여 벌이는 놀이굿이다. 포수 두 명이 사냥감을 다투다가 화해하고 사냥감을 나누는 과정을 연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 준다.

중산간 마을에서는 근세까지 농경과 더불어 수렵 활동을 계속해 왔는데, 산신놀이는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집안에서 사냥철을 앞두고 행하는 큰굿에서 연행된 놀이였다. 주로 사냥하는 모습을 연출한다고 해서 '사농놀이'라고도 부른다.

와산리가 중산간에 위치한 마을로 도내에서는 유일하게 산신놀이가 아직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용옥 큰심방은 "매년 단골들이 잊지 않고 신에게 정성을 드리기 위해 찾아주는 것이 너무 고맙다. 1970년대 새마운동의 여파로 미신타파운동 있었을 당시 제주의 심방들은 많은 고초를 겪었다"며 "칠머리당 영등굿이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되는 등 제주굿이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만큼 칠머리당 영등굿 이외에도 제주굿을 보존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이 필요해 보인다"고 강조했다.

제주의 큰심방 이용옥씨 "굿이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수단이었으면"

이용옥(58·사진) 큰심방은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에서 태어났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의 기능보유자인 김윤수 큰심방 부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심방의 집안은 외가 쪽으로 뛰어난 심방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외가의 조부모인 고 김성윤 심방과 정씨 부인 이후로 슬하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한 심방들이 많다. 남편인 김 심방의 집안도 4대째 무업을 이어오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심방 부부는 후에 제주에서 심방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고군찬 심방과 수양(收養) 관계를 맺었는데, 고 심방은 이 심방 부부에게 조상인 멩두와 제주시 와산리 등의 단골판을 넘겨주었다.

이런 집안 내력 탓에 이 심방은 9살이 되던 해에 무구(巫具)의 하나인 '간제비'를 줍게 된다. 주운 간제비를 몸안에 숨겼지만 이모가 이를 가지고 가 버렸고 이후 학교도 안가고 정신집중이 잘 되지 않았단다.

이를 걱정해 다시 간제비를 가져다 달라고 이모에게 부탁했고, 간제비가 돌아온뒤 점을 쳤는데 아주 잘 맞히더라는 칭찬을 들었다.

김 심방과 결혼 후 간제비를 친정에 두고 갔는데 남편의 꿈에 어떤 할머니가 나타나 자신을 박접한다고 하면서 나무랐다. 꿈이야기를 아내에게 했고, 이 심방은 다시 간제비를 가지고 왔고, 굿을 할때면 꼭 공싯상에 놓는다.

이 심방은 주위에 큰심방이 많아 굿을 제대로 배우기에 좋은 환경이기도 했지만, 굿을 익히고자 열심히 노력했고 심방으로서의 정체성도 매우 뚜렸했다.

그녀는 본풀이에 능하고, 큰굿도 진행할 수 있을만큼 제주도의 '굿도리'에도 밝아 앞으로 제주굿을 이끌어나갈 것으로 보인다.

이 심방은 "칠머리당영등굿이 유네스코에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된 후 굿을 바라보는 시선일 달라지고 있다"며 "굿이 종교의 의미가 아닌 굿판을 찾는 이들 누구에게나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의미로 다가섰으면 하는 바람" 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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