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양맥·부여족 정착 후 국가 형성"

"고구려·양맥·부여족 정착 후 국가 형성"
신용하 교수 제주박물관대학 '탐라국 형성의 원류' 강좌
  • 입력 : 2011. 05.09(월) 00:00
  • 표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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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국은 고조선문명권을 구성했던 고구려·양맥·부여족의 대이동 과정에서 건국된 뒤 섬 안의 마을공동체를 포섭하면서 전체 제주도로 확대 발전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사진은 삼성혈. /사진=한라일보DB

"B.C. 1세기 고조선문명권 민족대이동
'을나'·활쏘기 등 예맥족 관습과 동일"

탐라국은 고조선문명권을 구성했던 고구려족·양맥족·부여족의 대이동 과정에서 건국된 뒤 섬 안의 다른 지역 마을공동체를 포섭하면서 전체 제주도로 확대 발전했다는 학설이 발표됐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가 7일 제주대학교에서 열린 역사박물관대학 시민강좌에서 '탐라국 형성의 원류'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이같은 학설을 제시했다.

신 교수는 "지금까지 학술지를 통해 3~4편의 논문에서 탐라국 형성의 원류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해 찬반논란이 있었지만 제주에서 구체적 내용을 발표하기는 처음"이라며 "이같은 해석은 고·양·부 삼성설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고고학을 통해 증명하고, 제주에서 최초의 고대국가가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현대과학적으로 해석한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신 교수는 "B.C. 2세기부터 A.D. 1세기 사이에는 한국역사에서 국가를 처음 형성한 고조선국가와 고조선문명권을 구성했던 원민족들이 새 정착지를 찾아 새 국가를 세워 생활하려고 이동하는 민족대이동이 일어나게 됐다"며 "이 민족대이동의 동남방행렬 대추세 속에서 B.C. 1세기에서 A.D. 1세기에 부여족·양맥족·고구려족 일부가 해로로 시간차를 두면서 제주도에 도착해 제주 최초의 고대국가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이어 "그 사실의 일부가 고·양·부 3성씨의 결합에 의한 탐라국 성립 전설의 삼성설화로 남아 있는 것"이라며 "고을나는 고구려족 족장, 양을나는 양맥족 족장, 부을나는 부여족 족장으로는 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증명해주는 것으로는 ▷'을나'라는 족징의 호칭은 부여·양맥·고구려 등 북방에서 이동해온 예·맥족 호칭인 점 ▷'일본서기'에 탐라국 왕자 고씨가 일본에 사절로 갔을 때 고구려족임을 뜻하는 '구마(久麻)'로 표기한 점 ▷'신당서' 등 중국측 고문헌이 탐라국 국왕의 성을 부여·고구려 왕족의 성명 중 하나인 '유리(儒李)'라고 기록한 점 ▷용담동 석곽무덤에서 나온 철제 장검 2점이 만주 길림성과 대동강 이북 서북한 지역에서만 발견되고 한반도 남부·남해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점 등이 제시됐다.

또한 ▷제주도 여러 곳에서 발굴된 수혈주거지가 만주·한반도 맥족과 한족의 수혈주거양식과 동일한 점 ▷3을나가 나왔다는 모흥혈(毛興穴)은 고구려의 '수혈', 단군설화의 '동혈'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점 ▷3을나가 거주구역과 형제 순위를 정할 때 사용한 활쏘기가 맥족의 관습이었던 점 ▷탐라국 형성 초기 유적유물들이 모두 제주도 북방 해안에 집중된 점도 탐라국 건립 주체세력이 북방으로부터 들어온 고구려족·양맥족·부여족임을 알려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신 교수는 또 "탐라국 건국 직후인 A.D. 1세기 후반 벽랑국으로부터 상당한 규모의 인구 및 농경문화와 함께 우마 등 목축이 유입돼 탐라국 경제생활을 어채·수렵에서 농경목축으로 전환시켰다"며 "탐라국 성립기 인구는 8000명 정도로 당시 중규모의 중요한 고대국가였다고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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