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의 역사,제주-3](2)대가없이 베푼 섬주민

[표류의 역사,제주-3](2)대가없이 베푼 섬주민
밤낮없이 이어가며 제주 표류민 돌보다
1부. 제주바다를 건넌 사람들
  • 입력 : 2009. 01.30(금)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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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의 관문인 도청항을 통해 섬이 눈에 안겨온다. /사진=진선희기자

21명 바다서 목숨 잃고 8명 구사일생 청산도로
'표해록'에 도움 준 섬의 주민이름 일일이 거명


장한철 일행이 청산도에 머문 기간은 7일이었다. 장한철의 '표해록'을 보면 바람불고 비가 내렸던 1771년 신묘년 정월 초6일 청산도에 표착해 날이 맑은 정월 13일 섬을 떠나는 것으로 기록됐다. 이 기간동안 장한철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표해록'은 그런 궁금증을 안겨준다.

"이 땅은 청산도였고 주인은 박중무(朴重茂)였다. 해안가로부터 이 마을까지의 거리는 거의 10리였다. 해안 절벽으로부터 발을 헛디뎌 떨어진 뒤에 뱃사람들을 잃어버려 도깨비불이 길을 이끌어주지 않았더라면 필시 장차 광막한 들에서 두루 헤매다가 구릉과 골짜기 사이에서 얼어죽었을 것이다."

▶2명은 해안 절벽에서 떨어져 죽어

'옛 제주인의 표해록'(김봉옥·김지홍 역)에 실린 장한철의 '표해록'중 일부다. 장한철을 포함해 29명이 한 배에 타서 닻을 들어 올렸던 게 1770년 12월 25일. 류큐열도 호산도를 거쳐 베트남 상선에 구조됐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가까스로 도착한 섬이 청산도였다. 12일만의 일이었다.

청산도에 다다를 쯤엔 그중 절반의 목숨을 바다에 내던진 후였다. "청산도 해안에 상륙했을 때 살아남은 뱃사람이 오히려 10명이었지만 여기에 도착한 이는 오직 8명이니, 절벽에 추락하여 죽은 사람이 또한 2명이었다." 장한철은 이 사실을 알고 놀란 혼을 진정시키지 못한다. 사지가 오그라지고 온 뼈가 마디마디 아파왔다고 쓴 것은 과장이 아니다.

청산도 사람들은 제주 표류민들을 품어안았다. 시체를 거두어주고 여러 사람이 밤낮없이 서로 이어가며 부지런히 돌봤다. 바다에 빠져죽은 21명의 영혼에 대한 제사를 지낸 곳도 청산도다. 장한철은 김만련 김하택 곽순창 등 청산도 주민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며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해록'에 적어놓았다.

▶당리에 머물렀는지 확실치 않아

장한철은 청산도 어디쯤 기거했던 것일까. '해안가로부터 이 마을까리의 거리가 거의 10리'라는 단서만 있을 뿐 '표해록'어디에도 그가 몸을 뉘였던 마을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해안에 상륙했을 때 절벽에 추락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만큼 가파른 낭떠러지가 있는 청산도 서쪽 해안이 표착지점이 아닐까 추정할 뿐이다. 만일 그것이 맞다면 그곳에서 10리쯤 떨어진 지금의 당리에 장한철이 살았던 것으로 본다.

하지만 기록에 쓰여진 당촌(堂村)을 당리로 볼 경우 의문이 생긴다. 장한철과 사랑을 나눈 조씨 여인을 만나러 가는 대목에 '이날 밤 내가 당촌에 도착하여'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장한철이 당촌에 머물고 있었다면 그런 식의 표현은 쓰지 않을 것이다. 청산도 인근 지도(지금의 신지도)에도 당촌이 있는 것으로 기록돼 이 역시 헷갈린다.

230여년이 흐른 지금, 청산도 사람들중에 장한철의 이름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그런데, 몇몇 노인이 제주 표류민들에 얽힌 '전설'을 꺼냈다. 당리와 인접한 마을인 읍리의 양금수(76)노인회장은 "돛단배가 풍랑에 휩쓸려 제주사람 수십명이 죽었는데 그 뼈를 묻을 데가 없어서 읍리 바닷가에 갯돌무덤을 만들어줬다는 전설이 있다"고 했다.



▶'표해록'의 배경지 홍보·발굴을

당리 언덕배기 청산도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당집이 있다. 키 큰 소나무로 둘러싸인 당집 앞에서 오줌을 누면 '앉은뱅이'가 된다는 말이 있을 만큼 경외의 대상이다. 청산도 사람 곽순창이 살아남은 장한철에게 "오늘 길손이 보호받은 것도 혹 용신이 몰래 도와 그러한 것이 아니겠소"라며 용왕당을 안내한 적이 있다. 김희문 완도문화원장은 그것이 당리의 당집일 것으로 추정했다. 당집은 장한철과 조씨 여인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장소다.

장한철 일행은 신지도를 거쳐 뭍으로 향하기 위해 7일만에 청산도를 떠난다. 장한철은 섬을 빠져나오면서 "우리가 청산도에 있을 때의 주인은 아주 착한 사람이었는데, 쌀과 돈을 마련해주고 갓·창의·짚신을 사서 내가 길 떠나는 것을 챙겨주었다. 늘 은혜를 느끼지만 갚을 길이 없다"고 썼다. 제주 사람 장한철이 낯선 땅 청산도에서 얻은 감동은 이대로 잊혀지는 것일까. 정성희 청산면장은 "장한철이 쓴 '표해록'의 배경이 청산도라는 점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앞으로 '서편제' 영화촬영지 등과 더불어 역사문화관광지로 발굴하겠다"고 말했다.

/완도 청산도=진선희기자·백금탁기자 gtbaik@hallailbo.co.kr

장한철이 떠난 바다 제주해녀가 누빈다

청산도 제주인은 모두 해녀


장한철 일행은 파도에 떠밀려 청산도를 찾았지만, 그들은 살기 위해 섬에 발을 디뎠다. 청산도에 사는 제주 해녀들이다. 전직 공무원인 김방열씨(69·청산면 도청리)는 청산도의 제주사람은 모두 해녀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고 했다.

한때 청산도에는 해녀가 300명 가깝게 살았다. 지금은 20명 남짓이 뱃물질을 하고 있다.제주처럼 이곳 역시 젊은 해녀가 없다. 연령층이 50대에서 70대까지 이른다.

손애숙(57)씨는 우도에 살던 어머니를 따라 청산도에 정착했다. 그때가 열다섯이었다. 열일곱살에 물질을 배워 그 해 청산도 앞바다에 뛰어들었다. 올해 아흔이 된 손씨의 어머니는 일흔살때까지 물질을 멈추지 않았다. 고무옷이 나오지 않던 때 얇은 물소중이를 입고 물질을 하는 데 어찌 버겁지 않았을까. 그래도 물좋고, 공기좋고, 인심좋은 청산도에 의지하며 그 세월을 견뎠다.

최애순(62·사진)씨는 청산도에서 태어났다. 성산읍 시흥리에 살던 어머니는 해녀였다. 지금은 세상을 뜬 최씨의 어머니는 일본으로 가서 7년간 소식이 없던 남편을 그리다 해방 직후에 청산도로 왔다. 최씨는 열여섯살때 시흥리에 갔다가 그곳에서 물질을 배웠다. 또래들이 너나없이 물질을 하고 있어서 함께 물속을 누볐다. 청산도로 돌아와서 그는 해녀가 됐다.

청산도에 언제부터 제주 해녀가 정착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최씨는 어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해방 전에도 제주 해녀들이 청산도에 살았다고 했다. 풍선을 타고 청산도를 지나다 표착해 아예 둥지를 튼 제주도 부부도 있었다. 맑은 날이면 청산도에서 제주도가 훤히 바라다 보이는 만큼, 두 섬 사람들의 교류는 자연스런 일이었는지 모른다.

"'청산가서 글자랑 하지 마라'는 말이 있어요. 과거시험 보러 가던 선비들이 풍랑을 만나 청산도에 오는 일이 많았는데, 선비들이 글재주를 청산땅에 풀어놓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18세기를 살다간 제주사람 장한철. 2백여년 뒤 청산도에서 그는 그렇게 기억되고 있다.

/청산도=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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