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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여행과 나날' [한라일보] '여기보다 어딘가'를 믿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일상에 지쳐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돛을 미는 바람처럼 묵직한 등을 떠미는 순간들. 얼마 전에는 모두가 정해진 방향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지하철 계단의 한복판에서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뭔가 다른 바람이 등을 미는 것 같았고 여기에서 벗어나 정해지지 않은 방향으로 아주 천천히 움직여 닿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을 계획하는 일은 무척 설레는 일이지만 계획하지 않은 여행이 주었던 낯설고 귀한 당혹감들은 그에 못지않게 강렬했다. 쉬이 잊히지 않는 영화 속 장면처럼 종종 떠올라 몸을 관통하는 바람처럼 환기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일상에서 숨이 가빠진다고 느낄 때 그 환기의 에너지를 필요로 했던 것 같다. 겨우내 꽁꽁 닫아둔 창문을 여는 것처럼 안전이라는 위험에 빠진 나를 시험에 들게 하라. 감촉하는 것들로 방향을 다시 찾게 하라. 움직여 떠나라 길을 잃을지라도 세상 위에서 나를 요동치게 하라. 미야케 쇼 감독의 영화 <여행과 나날>은 여름과 겨울 두 계절이 등장하는 영화다. 영문 제목은 'Two Seasons, Two strangers'로 각각의 계절에 낯선 곳을 찾은 두 사람이 등장한다. 여름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자는 작가 '이'가 쓴 시나리오 속 인물이다. 그녀는 바다가 있는 한적한 마을에서 낯선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나눠 먹고 비를 맞으며 바다 수영을 한다. 고즈넉하면서도 격렬한 해변의 풍경들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비가 쏟아지던 바다에서 수영을 하던 두 사람이 있던 그들의 풍경이 공간 속 스크린에 띄워진다. 여름의 영화가 끝난 것이다. 자신이 시나리오를 맡은 그 영화가 끝나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 등장한 작가 '이'는 스스로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표정으로 보아 그 말은 진심인 것 같다. 말로 무언가를 정의하는 일인 자신의 직업이 버거워진 작가 이는 그 무수한 말들로 이뤄진 일상에서 도망치는 것처럼 설국의 작은 마을로 향한다. 고향을 떠나온 이후부터 매일이 여행인 것 같다고 느끼던 그에게 새로운 시간이 펼쳐진다. 터널의 끝에는 눈으로 뒤덮인 백지 같은 시공간이 있고 이의 한 발 한 발은 말로는 힘든 삶의 문장들을 그곳에 새기는 예기치 못한 회복의 시도가 된다. <여행과 나날>은 여백으로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영화와 영화 속 우연한 만남들은 인물들이 의도하지 않은 지점에서 이루어지고 서툰 불안을 잠재우는 귀한 호기심이 그 만남의 여정을 견인한다. 대단한 사건이 있는 것은 아닌데 영화가 끝난 후 어떤 장면들이 품고 있던 많은 이야기들이 다시 내리는 눈처럼 소복소복 쌓이는 경험을 전해주는 영화다. 또한 말로부터 도망치듯 떠난 이들이기에 영화 속 대사들은 최소한의 소통을 위한 것처럼 요긴하게 쓰인다. 또박또박 노트에 연필로 글을 쓰는 작가 이처럼 <여행과 나날>의 인물들은 필요한 말들을 간추려 솔직하고 정확하게 꺼내 놓는 방식으로 소통한다. 그 사이와 사이에 파도와 눈 아래에 끝내 말이 되지 못한 감정의 언어들도 충분하게 요동치며 관객들의 마음에 가 닿는다. 이유를 찾는 고난에서 벗어나 지금을 대하는 태도를 찾는 쪽으로 선회한 이의 홀가분한 몸놀림처럼 이 영화가 적당한 무게로 움직이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 같다. ![]()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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