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오피니언
[김완병의 목요담론] 수눌음과 인센티브는 도시재생의 활력소이다
김미림 기자 kimmirimm@ihalla.com
입력 : 2025. 10.23. 02:30:00
[한라일보] 조선시대 제주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대표적인 고충은 척박한 자연환경, 출국금지령, 공납제도와 군역이다. 특히 군역은 해산물 채취와 가축 사육만큼이나 힘들고 괴로웠다. 조선의 군사 조직은 호적과 군적을 바탕으로 구성됐는데, 집마다 일정한 군역 의무를 부담해야 했다. 경제적 사정에 따라 3성 9진에 보낼 형편이 안 됐기에, 동네 사람들의 '공동체적 삶'이 곧 살아남는 전략이었다. 매일 서로의 안위를 물을 정도로, 모두가 가족이었다.

군역은 연역(煙役), 병역(兵役), 군포(軍布) 등 3가지로 구분되며, 병역(兵役)은 지금의 징병제도처럼 개인별로 져야 할 군복무이다. 군포(軍布)는 직접 복무하지 않고, 돈이나 물품으로 대신하는 제도다. 연역(煙役)은 군포 시행 이전에 행해졌던 제도로, 여러 가구가 공동 부담하는 군역이다. '연(煙)'은 가구(戶) 단위를 의미하며, 군인 1명을 징발할 때 여러 연(집)이 공동으로 부담하는 형태다. 몇 집이 합쳐서 한 명의 군인을 보내고, 나머지 집들은 대신에 군복무자에게 군복이나 식량과 같은 물자를 지원하는 시스템이다. 마을의 규모와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보통 3~4연(煙)이 1정(丁, 군역 대상자)을 담당했다. 남자가 없는 집안에서는 여성이 동원되거나 연역을 부담했으며, 이를 '여정(女丁)'라 했으며, 제주에만 시행된 특수 신분이다. 예전부터 제주 사람들은 마을이나 나라의 일을 공동으로 부담하면서, 자연스럽게 수눌음 정신을 가지게 됐다.

당시 고구마는 식량자원이었기에, 고구마의 수확량은 연역 지원을 책임지는 물자였다. 고구마 재배가 정착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백성들이 애써 수확한 고구마를 관에서 지나치게 침탈하자, 고구마를 심거나 수확하는 일은 오히려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1794년 12월 비변사의 채홍원(蔡弘遠)은 고구마를 많이 심고 많이 수확하는 자는 연역을 감해줄 것을 건의하자, 정조 임금이 허락했다. 덕분에 제주 백성들은 고구마를 흙처럼 여길 정도로 정성을 다하게 되니 활력이 넘쳤다. 혼자서는 연역도 농사도 버거웠지만, 삼삼오오 모여 힘든 일을 극복하면서 저절로 살맛이 달콤했다.

예나 지금이나 먹고사는 민생은 여전히 큰일이다. 첨단환경, 물류 혁신, 고도화된 세금제도와 병역의무 등이 시행되고 있음에도, 고통받는 이들이 많다. 민생회복 소비쿠폰이 골목상권을 부분적으로 회복시켰지만, 현장은 악전고투이다. 소상공인들과 관광객들을 비롯 모두가 합심해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고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묘안과 인센티브를 찾아야 한다.

한때 고구마는 제주경제의 견인차처럼 그 위세가 대단했다. 고구마를 캘 때, 뿌리에 달린 큼직한 고구마들이 연달아 올라올 때는 정말이지 신바람이 났다. 옛 선인들의 지혜를 발판으로 도심에 자리 잡은 공공기관들이 소상공인들과의 연대와 협업을 통해, 거리와 문화예술공간이 달콤한 행사와 인파로 넘치길 바란다. <김완병 제주학연구센터장>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이 기사는 한라일보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ihalla.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문의 메일 : webmaster@ihall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