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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일보] 제주에 첫발을 디딘 지 꼭 12년, 그 시간은 한 편의 긴 계절극과도 같았다. 늘 배경처럼 깔려 있던 바다와 바람, 그리고 사계절 변함없이 서 있는 한라산은 나의 무대이자 안식처였다. 나는 그 무대 위에서 '교수'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며 강의실과 연구실, 그리고 섬 구석구석을 오갔다.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의 설렘은 지금도 생생하다. 바다 건너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었고, 강의실 창 너머로 보이는 푸른 수평선은 나의 열정에 불을 지폈다. 아침마다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하루를 열어 주었고, 저녁에는 붉게 물든 하늘이 조용한 위로를 건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아름다움 속에도 결코 만만치 않은 현실이 숨어 있음을 알게 됐다. 해마다 학생 수는 조금씩 줄어들었고, 작은 대학이 맞닥뜨린 구조적인 한계는 점점 뚜렷해졌다. 빈자리를 메우고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나는 외국인 학생 유치에 온 힘을 쏟았다. 낯선 땅에 발을 디딘 그들이 조기에 적응할 수 있도록 비자 문제 해결, 주거와 생활 지원, 그리고 학업 상담까지 발로 뛰었다. 밤늦게 기숙사 앞에서 언어와 문화의 장벽으로 힘들어하던 학생을 다독이던 날도 있었고, 병원 응급실로 함께 달려간 새벽도 있었다. 어떤 학생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또 어떤 학생은 끝까지 도전해 졸업 무대에 섰다. 그 과정에서 함께 웃고 울었던 시간은 나의 가장 빛나는 기억이 됐다. 하지만 나 자신도 서서히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여건은 쉽게 변하지 않았고, 작은 대학이 안고 가야 할 짐은 무거웠다. 현실의 파도 앞에서 이상을 지키는 일은 뜨거운 열정만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럴수록 나는 바람처럼 흔들리면서도 뿌리 내리려 애썼다. 그리고 지금, 물러나야 할 시점이 왔음을 조용히 받아들인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새로운 길이 열리리라 믿기에, 나는 이 대학이 앞으로 상황에 맞는 길을 찾고, 오랫동안 지역과 함께 숨 쉬는 배움터로 남기를 바란다. 돌아보면 제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여전히 따뜻한 곳이다. 퇴근길에 마주하던 오름 넘어 붉은 노을, 봄마다 길가와 들판을 뒤덮던 벚꽃과 노란 유채꽃, 겨울 한라산의 흰 능선은 내 마음을 깊이 위로했다. 학생들과 오름을 오르며 나눈 진솔한 대화, 졸업식 날 받아 든 서툰 맞춤법의 편지, 무슨 날만 되면 어김없이 도착한 안부 메시지는 평생 간직할 선물이다. 그것들은 나를 이 섬에 묶어 두었던 보이지 않는 실이자, 다시 돌아오라 속삭이는 바람의 목소리다. 그리고 제주에서 보낸 이 12년의 시간은, 기쁨과 어려움, 배움과 성장이 뒤섞인 채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지고 소중한 시절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주소를 바꾸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함께했던 사람들과의 인연, 그 속에서 성장하고 변해 온 나 자신, 그리고 그 시절의 공기와 작별하는 일이다. 아쉬움이 크지만, 나는 언젠가 다시 이 섬에 발을 디딜 날이 오리라 믿는다. 그때에도 한라산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을 것이고, 바다는 여전히 푸를 것이다. 그리고 내 기억 속의 제주는, 늘 바람처럼 자유롭고, 변함없이 내 마음 한가운데 살아 있을 것이다 . <최화열 제주국제대학교 융합경영학부 교수>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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