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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일보] 한일병합의 해인 1910년, 일제는 조선의 읍성과 진성 등을 허무는 '읍성철폐령'과 두 나라 합병에 동조하는 고관대작에게 귀족(후작·백작·자작·남작)의 지위를 부여하는 '조선귀족령'도 함께 발동했다. 읍성철폐령은 조선의 역사문화를 허무는 물리적 파괴였고, 조선귀족령은 일제에 굴종케 하는 정신적 파괴였다. 한양도성과 제주목성을 비롯한 250여 읍성은 중앙과 지역의 정치·행정의 중심지이자 정체성의 심장부였다. 군대가 주둔한 진성 역시 외세 침략에 맞선 저항의 보루이자 항쟁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역사문화 깃든 읍성과 진성 등을 일제는 구시대적 유물이라며 파괴에 혈안이었다. 성벽을 허문 자리에 도로와 집들이 들어서면서 조선의 과거는 철저히 잊혀져갔다. 을묘왜변(1555년) 시 3일 만에 왜구 1000여 명을 물리친 제주도에서는 더욱 심했다. 탐라제주 읍성의 동문(연상루)·서문(진서루)·남문(정원루)을 우선 무너뜨린 일제는, 3㎞ 넘는 성벽을 산지항 구축용으로 바다에 투척했다. 그런 연유로 성문을 지키던 28기 돌하르방들은 제자리를 떠나 길을 잃거나 지금도 떠돌고 있다. 국가유산 지역인 정의현성만이 1980년대 복원됐으나, 대정현성은 성문 복원 없이 파괴된 성벽 일부가 재구축됐을 뿐이다. 바다를 지키던 9개의 진성 역시 파괴돼 대개의 성담들은 바다에 던져졌으며, 일부는 그 역사와 가치를 배우지 못한 우리들에 의해 무너졌다. 어디 그뿐이랴. 9진성들과 횃불과 연기로 신호를 주고받던 25봉수대와 38연대 역시 파괴됐다. 조선귀족령은 조선을 영구히 지배하려 획책한 일제의 치밀한 계략이자 음모였다. 한일병탄에 앞장선 왕족과 고관들인 조선귀족은 일제의 협력자이자 앞잡이였다. 이완용으로 대변되는 조선귀족은 158명이었다. '파괴와 회유'로 상징되는 읍성철폐령과 조선귀족령은, 일제의 식민통치가 얼마나 파괴적이고 교활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역사문화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지우는 한편, 기득권층 회유를 통해 민중의 저항을 무력화하려 했으니. 이 과정에서 조선이라는 나라는 뿌리째 흔들렸고, 백성은 갈 길을 잃기도 했다. 광복 80년을 맞이하는 지금도, 반민특위가 해체된 그날 이후 어디엔가 묻혀 있는 '친일의 역사'을 청산하자고 여전히 말하고 있다. '읍성철폐령과 조선귀족령'을 재조명하는 것은 일제의 식민책략을 제대로 인지하고, 우리의 바른 역사의식을 공유하기 위함이다. 일제가 파괴한 성문 등을 복원함은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함이고 무너진 자존을 일으키기 위함이다. 주민자치 시대인데도, 나라에서도 지방에서도 잃어버린 역사 복원은 요원한가 보다. 일제의 '읍성철폐령과 조선귀족령'이 여태 교과서에 실리지 않고 있음이 이를 증거 한다. 우리가 당한 일제강점기가 부끄러워서일까? 아니면 아직도 친일사관적인 교과서 편찬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무엇 때문일까? <문영택 (사)질토래비 이사장>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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