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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여름이 지나가면' [한라일보]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잊고 싶지 않았던 행복했던 순간들이 나를 다시 찾아올 때는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그런데 잊고 싶었던 순간들 또한 나를 찾아온다. 저 깊은 곳에 묻어둔 어떤 순간의 씨앗이 일순간 다시 싹을 틔운다. 오랜 시간 동안 햇빛도 보지 않았고 물도 주지 않았는데 쑥쑥 자라 성큼 존재감을 드러내고 시야에 가득 찬다. 그때는 애써 외면했던 뭉툭한 상처의 모양이 이제는 세세하고 또렷하게 보인다. 후회의 진동이 아무리 세차도 그때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믿고 있었는데 지나가지 않은 계절이 여전히 머물러 있다니. 나는 시절에 사과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계절과 화해할 수 있을까. 장병기 감독의 영화 <여름이 지나가면>은 농어촌특별전형의 수혜를 입고자 지방 소도시로 전학 온 초등학생 기준이 만난 여름에 대한 이야기다. 엄마의 의지로 이루어진 이 전학이 기준의 맘에 들 리가 없고 새로운 세계의 이들과 친해지고 싶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 세계에 발을 들이자 마자 기준의 새 운동화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도 생긴다. 그런 기준 앞에 소문난 문제아들인 동급생 영준과 중학생 영문 형제가 나타나다. 부모 없이 단둘이 사는 불우한 이 형제는 비행을 일 삼지만 처벌과 보호라는 시스템에서는 의아할 정도로 방치된 존재들로 내내 시큰둥하던 기준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여름 기준은 영준과 영문의 낯선 세계 속으로 홀린 듯이 들어서고 이제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타인의 삶 속에서 자신의 숨겨둔 감정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여름이 지나가면>은 '지방 소도시 여름의 아이들'이라는 낭만적인 선입견을 모조리 해체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아름다운 여름 풍경을 배경으로 서로 우정을 나누며 성장하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무책임한 관망의 시선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알싸한 공기로 가득하다. 부모의 그늘 아래에서 땀을 식히고 분을 삭히는 기준이 가진 권력과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조금 더 강자로 만들어야 하는 영문의 본능이 충돌하기 시작하면 <여름이 지나가면>을 그저 성장 영화라고 부르는 것은 마땅치 않게 느껴진다. 기준이 영문을 동경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그 시절 눈에 보이는 힘을 가진 이의 곁에 서고 싶다는 욕망은 쾌감을 위한 당연한 발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숙고하지 않은 감정의 발동이 만들어 낸 흠은 충분히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 또래 남자애들은 다 그런 거라고 세상이 말해주니까. 잘못을 뉘우치고 부모님의 안전한 세계로 돌아가면 어떤 해결은 그쯤에서 일단락되곤 하니까. 기준은 세상이 다루기 쉬운 존재다. 부모가 있고 공부를 잘하고 범죄 이력이 없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분류와 처리기 쉬운 존재다. 문제는 영문과 영준이다. 부모가 없는 삶을 스스로 살아가는 아이들, 시설로 보내졌지만 다시 돌아왔고 아주 어리지도 그렇다고 성인도 아닌 아이들.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고 힘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도 있는 그 누구도 어떻게 다가가야 할 지 도통 모르겠는 성장 중인 존재들. '무럭무럭 자란다'라는 말이 남의 아이의 경우가 된다면 이토록 무섭고 어려울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이들. 영문과 영준 형제의 매일은 생존의 갱신에 다름 아니다. 이 세계 속으로 기준이 침입한다. 악의가 없었다는 말로는 해결되지 않는 잦은 사고들과 드문 사과들이 이어지면서 아이들 사이의 비밀은 부풀어오르는 풍선처럼 위태롭게 커진다. 기준이 잠깐 맛 본 낯설고 매혹적인 타인의 세계 전체가 위태롭게 흔들린다. ![]()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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